가을, 한 낮, 노란색. 2003. 10. 8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0-09 09:47     조회 : 1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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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OCTOBER.
AUSTRIA VIENNA SHOW WINDOW. PHOTO


"껍질을 벗길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얼굴"

지금은 고인이 되신지 오래인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절대고독'(絶對孤獨)이란 시(詩)의 한 구절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2학년, 그 무렵 가을이었다.
이 시인의 시를 아주 좋아해서 당시 학교 교지에 '시인의 초상(肖像)'이란 제목으로 시인의 시에 대해서 산문까지 쓴 적이 있었다.

끔찍하게 조숙했던 것일까.
그냥 '고독'도 아니고 '절대고독'이라니.

써 가을이다.
짧은 가을은 이내 스쳐 지나갈테고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름에 시작된 일들이 계속해서 진행중이고 소소한 감상조차도 스스로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한 낮에는 동네 산중턱에 있는 갤러리 카페 야외 테이블에 혼자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오랫만에 해바라기를 다 했다. 두어그루 소나무를 감싸고 도는 바람이 햇살과 마주치면서 사각사각 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고 햇살은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까불거렸다.

하늘을 올려다 봤다.
구름이 하늘 한 가운데서 우로 사선을 길게 뻗어 북한산 산봉우리 끄트머리를 타고 흘렀다.
그냥 한동안 무심코 그 구름을 쳐다봤다. 며칠 전 문상으로 병원을 다녀와서 그런지 요며칠은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도 예사롭게 보여지지 않는다.
절기(節期) 때문인가.

병원 장례식장 입구에 일찍 물든 노란색의 나무 이파리가 백열등의 불빛에 사르고 흔들리면서 파르르 떨고 있었고 앰블랜스가 입구에 도착하고 누군가의 주검이 흰시트에 둘둘 말려 딱딱한 나뭇대기같은 택배물건처럼 들려져 영안실 입구로 들어간다.
병원 실내가 금연이라 입구에 몰려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에 담배를 물고 누군가의 주검을 힐끔거리고 잠시 쳐다본다. 아니면 저마다 들고있는 핸드폰을 입가에 대고 떠든다.
하나같이 두텁고 기름진 얼굴들이 불빛을 받아 번들번들거린다. 당연히 그 누군가의 주검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단단하게 마른 흰얼굴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해바라기를 긴 시간 오래할 수는 없었다.
가을을 맞을 준비는 없었지만 가을은 성큼 머리위로 산산(霰霰)하게 다가와 있었다.
난 속수무책인 채로 그냥 이 가을을 받아들일 수 밖엔 없다.

여기 김현승님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

<천국(天國)은 들에도>

나비 한 점 날지않는
혼자 가는 들길엔
발자국 소리뿐.
풀잎 하나 일지않는
혼자 가는 들길엔
검은 그림자 뿐.

누워 계시던 어머니
이런 들판에 홀로 계실까?
어머니 어머니 생각 때문에도
천국은 들 가운데 있을 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