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안, 연극, 일본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1-21 12:59     조회 : 9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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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의 딸 노리노미야 공주 <섬> 공연 관람, 일본 동경

투안의 나이 스물 다섯.
난 그 때 그 시절, 과연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았을까.
회색(灰色) 빛이었다.
마디마디 고통의 기억들이 마치 흑백의 몽따쥬처럼 스친다.
출구(出口)는 없었다.
어렵고 가난하게 창작연극을 했지만 가난은 더하기만 했고. 이따금 텔레비전 일을 했지만, 독재권력의 서슬에 내가 쓴 극본은 빨간 줄이 그어져 퇴짜맞기가 일쑤. 몸에 받지도 않는 독한 술을 퍼마시고, 허기에 찬 연애를 했다. 그 때 난 그 현실을 살면서 진리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혼자서 물었다.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사회는, 정치는, 그리고 한국에서의 예술은.
나는 매일같이 이런 화두 앞에서 가파른 질문을 스스로 해대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인간의 진정성은 있는가? 과연

기실, 인생이란 위험이 가득하고 너무 짧다는 건 그 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은 해답을 찾았는가.

없다.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아예 해답이 없다.
난 그걸 찾았다.
그건 진리나 정의가 내 자신 속에, 내 몸에, 내 마음에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난 알았고 난 그걸 겨우 찾았다.
이십 년이나 더 걸려서 이제.




파리 현지시간으로 2002년 7월 12일 오후 3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내리자마자 담배를 피워 물 수 있어서 좋았다.
열 시간 너머 강제로 깨끗해진 내 폐는 딱 열 두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탁해지지만.
담배연기는 내 무거운 머리를 잠시나마 가볍게 해 준다.
불행하게도 난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비행시간 끝에 비행기에서 막 내린 몸은 마치 물먹은 두꺼운 스폰지가 내 몸을 둘둘 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우! 미스터 킴! 어서 오세요. 드디어 파리에 왔군요!"

난 '투안'과 서로 뺨을 갖다대고 인사를 한다.
언제나 '투안'의 뺨은 따뜻하다.
"잘 있었어?"
내가 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마구 헝클면서 만질 때마다
그녀는 사내아이처럼 후-후하고 웃는다.

"대단했더군요. 미스터 킴! 일본에서는. 일본 신문마다 크게 났잖아요.
일본 텔레비전에서도 크게 다루었더군요"
그녀는 내 일본인 스탭이 그녀에게 스크랩으로 보낸, 2001년 12월에 있었던 일본 오사카에서의 내 공연 <섬>의 일본공연 신문보도기사와 텔레비전 뉴스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미스터 킴! 그런데 일본말은 아세요?"
"몰라. 통역이 있었지"
"일본어로, 일본 스탭들로, 일본 여배우들로 공연을 했잖아요?"
"그랬지"
"기적같은 일이군요. 미스터 킴이 일본말을 모르면서도 일본에서 연극공연을 성공시켰 으니까요"

그래, '투안'의 말처럼 기적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대단히 불운했고 악조건의 일본 공연이었다.
평소에 신뢰를 하던 문화관광부 공보사무관이 일본 단체를 소개했고,
난 소개받은 일본 단체가 일본에서 대단한 단체인 줄 알고
일본 단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으로 건너 가 공연 준비를 하다가,
그들이 극우적(極右的)인 정치적 성향의 집단이고
그 단체의 대표가 너무 엉뚱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일본 여배우들을 캐스팅했고, 공연장이 정해진 상태였다.
진퇴양난이었다.
그냥 일본에서 철수를 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 식민지를 당했던 한국이란 내 나라는 일본이 특수한 외국이었다.
식민지의 치욕스런 경험, 조센진, 한국인, 일본인들의 뇌리 속에 아직까지 고인 편견들.
사정을 잘 모르는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혼자 건너 온 연출가가 공연준비를 하다가 잘 안되니까 도망갔다"
이런 치사한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초청형식이니까 제작비를 상당부분 부담하겠다는 말만 믿고 바다를 건넜다가,
일본 단체의 정체를 알고 그들의 더러운 흥정을 거절했다.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나, 그 어느 곳에서도 제작비 마련이 쉽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내 작업실 스튜디오를 담보로 사채를 빌려,
다시 바다를 건너가 공연제작을 해야만 했다.
기가 막혔다.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내가 낯선 일본 땅에서
매일매일 악조건을 이겨내는 역전(逆戰)의 드라마를 연출해야만 했다.
오사카 지리도 모르고 일본말은 전혀 못하고.
교포라 해서 같은 동포라고 알았지만, 내가 만나진 일부 교포는 그들 이기적 필요에 따라서 움직였다.
그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정체가 아주 불분명한.

그러나 눈물겨운 뜨거운 만남도 있었다.
좋은 교포들, 또 다른 반듯한 일본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난 퇴각을 하지 않았다.
공연직전, 일본 텔레비전과 유력한 신문들에서 드디어 중요한 기사로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 연극의 연습실을 열 번도 더 찾아오고,
매 공연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세심하게 챙겨보았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나까가와(中川 恒) 기자.
끊임없이 질문을 해 되고, 빠짐없이 살펴보고, 철저하게 조사와 준비, 취재를 하고.
공연전에 첫 번째 기사를 내 보내고 공연이 끝나고 해를 넘겨, 2002년 1월 4일자 아사히 신문 문화면 톱기사로 연극이 보도가 됐다.
"연극의 예술적 독창성과 일본과 한국의 새로운 문화예술 교류의 성공적 작품"으로 공연리뷰가 기사로 나왔다.
이런 성실한 기자들이 일본의 저력이었나.
일본의 기자들, 내가 만났던 그들은 너스레나 거들먹거림이 없었다.
공연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 뭉치의 일본 보도기사 묶음을 본 후배와 지인들은 하나같이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배우 김금지씨는
"상수씨, 왜? 한국 신문에 보도자료를 안 돌려?
이렇게 일본 신문에 대문짝하게 크게 났는데, 알려야지!"
답답해했다. 그 분의 마음도 알겠다. 그러나 난 충분히 지치고, 또 싫었다.
외국에서 공연을 할 때면 별 성과도 없었는데도, 국내기자들을 데리고 가서 과장되게 떠들면서 호평을 받았느니 하면서 역(逆)으로 한국에서 자기 처세에 이용하는 가짜 예술가들.
난 그게 구역질이 났다.
일본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이 모두들 동경에서 근무를 하고 정치 경제 위주의 기사를 중심으로 취재하는 특파원들의 입장에서는 문화 예술 공연까지 먼 지역인 오사카 취재는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테고.
그리고 뻔질나게 일본을 드나들면서 공연이나 미술전시를 하는, 의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일부 한국사람들의 행태들, 어디 그게 예술행사 뿐인가.

"내년엔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공연을 하게 됐지요? 저도 가보고 싶어요"
"그래. 투안도 일본에서 와서 봐."

2003년 4월 동경에서 <섬> 공연을 했다.
투안은 파리의과대학에서 마지막 실습학기중이라 끝내 일본을 올 수 없었다. 일본 <섬> 동경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일본의 3대 신문인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가 주요기사로 취급을 했고 일본 전국으로 방영되는 4개의 텔레비전이 보도를 했으며 19군데의 일본매체에서 기사로 다루었다. 요미우리 신문의 인터뷰에는 "일본에 마음을 심는다"라는 제목으로 내가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이유를 인터뷰로 설명했고 니혼게자이 신문은 "현재의 일본 사회를 문제삼고 있는 연극"으로 연극의 주제가 한국을 떠나서도 일본에도 해당된다는 주제의 보편성을 기사로 냈다. 더욱이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이라할 수 있는 아사히신문은 2차례에 걸쳐서 취재와 인터뷰를 했다. 객석은 전공연이 만석이었고 한국특파원들도 취재를 다녀갔다. "한국 창작연극을 일본에서 일본배우와 스탭들에 의한 현지언어로 현지화시켰고 한일 교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KBS 특파원이 현지발로 뉴스보도를 했고 연습장을 취재하고 공연을 본 동아일보 조헌주 특파원은 공연을 관람했던 일본황실의 외동딸 노리노미야 공주가 "정말 작품이 좋았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그녀의 양친인 아키히도 천황부부에게 말을 했고, 천황부부는 "한국창작연극을 일본어로 일본인 배우로 공연한 것에 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고 기사를 냈다. 2차 대전의 전쟁범죄자이고 식민지 지배자의 우두머리였던 히로히토 일본천황의 외손녀인 노리노미야 공주와 악수를 하고 나란히 옆좌석에서 동석을 하여 내 공연을 본 내 심사는 어딘가 모르게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세상이 바뀐 것인가. 60여년전 일본국국주의 식민주의는 당시 10대 소녀였던 내 어머니에게 한겨울 운동장에 줄을 세워놓고 강제로 일본의 교육칙어를 외우게 했고 일본의 황궁을 향해서 허리를 굽히게 했다. 강제징용이니 정신대니 한반도 우리민족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긴 과거역사는 현재의 나에게 과연 무엇으로 살아있는 것인가.

사진 산문집 <파리의 투안 두옹>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