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는 글, 한국의 광신기독교 경계도 없는가.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07-22 16:49     조회 : 9097    
나는 벌써 여러 번 얘기했다.
언젠가는 한국의 반그리스도적인 기독교가 한국에서 사회 국가적 큰 장애와 논란이 되고 말 것이란 지적을.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부패에 더하여 조악한 이념 싸움을 가로질러 빈부격차의 양극화 현실 틈새로 한국의 광신적 기독교의 허장성세 교세는 사회 공동체를 깊은 혼돈에 빠트리고 말 것이란 가정은 이제 현실이 됐다.

특정 목사를 중심으로 한 대형교회의 끊임없는 교세 키우기 경쟁은 반사회적 반윤리적인 행태는 물론이고, 오늘 날 한국인의 정체성 혼란을 비집고 무지몽매한 대중현실 속에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파고들면서 종교를 빌어 재물을 밝히는 축재(蓄財)놀음에 날 지고 샌다. 
이제 이 논란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세계 여러 국가 도시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겠지만, 어떤 특정 외국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종교의 이름을 걸고 광화문 한 복판에서 수천 명이 무리를 지어 이상한 노래를 하고 대형 스피커로 소음을 내면서 한국에 ‘평화’를 대신 걱정해주겠다고 떠들어대고 기도를 해주겠다고 설친다면 과연 한국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선교를 한다고 의료봉사를 한다고 년 평균 1만 명 넘는 한국의 기독교 교인들이 세계 곳곳을 나다닌다. 그중에는 기독교 종교의 본질인 사랑과 박애정신으로 희생과 헌신으로 간난(艱難)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드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의 문제는 도를 넘은 한국에 광신 기독교의 처사다.   
 
지난해 한국의 기독교인 1200여명이 아프카니스탄 수도 카불 거리에서 '평화 대행진'을 하겠다며 아프간에 들어갔지만 당연히 추방됐다. 이는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모독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땅에서는 종교 선교란 바로 범죄 사건이 된다.

전국의 밤하늘이 뻘건 십자가로 뒤 덥히는 것도 모자라 신도 머리수와 교회의 크기에 따라 교회를 사고 판지 이미 오래인 한국의 일부 기독교 현실.

해외를 다니다보면 어디를 가 봐도 한국의 교회들이 난장(亂場)을 떤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조용한 바닷가에 갔을 때다. 엄청난 크기의 한국 교회들을 알리는 한글 대형 간판들, 교세 경쟁은 나라 밖에서도 무차별이다.
깨끗한 뉴질랜드 자연 경관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서울 유명 교회의 대형간판들 아래로 일요 예배를 본다고 차려입은 한국인들이 교회앞에 타고 온 승용차가 도로 차선을 무단으로 넘치게 메웠다. 그 앞을 지나며 이 요상한 광경을 보자니 불쾌하고 슬펐다.
필리핀 산기슭을 마구 부시고 한국 관광객을 불러들인다고 한국 투기 자본이 지은 골프장 건물 기둥에 '부대찌게' '갈비탕'이란 삐뚤어진 한글 글씨를 볼 때 보다 더 머리가 아팠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세계 각 나라에 마구 쏘다니면서 실례를 해도 되는 건가.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 불신검문으로 체포된 23명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길 바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정말 좀 자중할 수 없겠는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여.
우리 국민들 그냥 국민하기에도 이미 너무 많이 지치고 피곤하다. 한국의 기독교가 피곤에 절은 국민들에게 짜증과 놀램에 더하여 가중치의 피곤까지 더하게 한다면야 이는 종교 활동의 경우가 결코 아니잖는가.


더하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 피납자들을 무사히 석방시킬 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예견하건데 한국 정부가 별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없기 십상이다.
미국은 반테러 전쟁 방침이 테러집단과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원칙이란다. 물론 이 원칙이 자국민이나 자국의 이익과 연결된다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반 외교원칙이 그렇단다.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의 한계란 곧 우리 외교의 현실이고 더도 덜도 아닌 딱 국제력의 수준을 말한다. 그래서 내실을 다지는 게 국력의 기본이다.
선교나 봉사도 우리 내실에서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그러나 어쨌든 정부는 최대한의 외교력을 발휘해 이들의 생명을 꼭 구해야만 한다.
그게 이 나라 정부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