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는, 10 - 위기의 본질은 경제가 아닌 문화적 황폐함, 삶의 양식으로 문화가 위기이다.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08-07 08:26     조회 : 7694    
지난 정부나 현재의 정부는 개혁의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했고 그 여파는 우리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집단들이 작금에 보여 주는 ‘정치적 붕괴’는 극단적인 분열과 파탄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이미 도를 넘었다.
반개혁의 세력들만이 노무현 정부의 발목을 잡았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정치의 총론과 각론은 방향을 잃었고, 국민들이 기대하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믿음은 무너졌고 2007년 현재, 우리들 삶의 고뇌는 점점 다급해지고 있다.

먼저 경제 문제만 하더라도, 노 정부는 지금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며 정부의 경제 정책과 개혁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몇 가지 통계를 들이댄다. 그러나 그 수치 뒤에 은폐된 고통은, 그 통계 너머에 있는 폐해는 과연 없을까. 불평등이 구조화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거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화되고 있다.

경제의 효율성과 개인의 생존권 강제 박탈은 과연 어떤 함수인가.
경제 발전은 국민 생활의 개선과 향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이 희생하는 경제 발전이란 본말의 전도에 다름 아니다.

때때로 정부의 발표를 듣고 보노라면, 무제한적이고 무차별적인 시장 논리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그 누구든 지금의 이 경쟁에서 밀리면 종내는 일상의 삶으로부터도 퇴출당할 것이라는 위협이 공공연하기까지 하다.

경제 문제의 중요성이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경제 성장 과정에서 찌그러진 분배 구조를 바로잡고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는다면, 경제 개혁은 제한된 개선, ‘위장된 개혁’으로 문제의 본질을 잠시 가릴 뿐, 문제를 더 어렵게 할 것이다.

또한 기득권 구체제의 일정 세력에 포섭되어 그들의 작동에 움직이면서 ‘화합’이라고 얘기하는 지난 10년 정부의 본질적 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난망하게 만들어 왔다.
정당 제도는 이름만 있을 뿐, 패거리 정치가 그 속성인 후진국형 정치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통령의 중심은 계속 흔들렸고 현실 정치의 시스템은 거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고, 독점적인 자본으로 대표되는 재벌의 힘은 IMF 위기 이후 도리어 증대되었고 노동 현실은 위기를 맞았다. 이는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를 표방했던 이들 정부의 현실 개혁이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했음을 뜻한다.
정부의 많은 정책은 일관된 개혁 의지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책은 빈곤하다 못해 실천력이 뒤떨어지며 행정 체계는 계속해서 난맥을 보였고, 보이고 있다.

사회 구조를 개편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 정권보다도 더 기득권층에 포섭되는 경향이 짙었다.
무엇보다도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바뀌어 거꾸로 뒤집혀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향한 개혁일까.
노동자들은 정부의 개혁이 대기업과 자본 중심적 입장이며 노동자들은 안중에도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때는 ‘서민 경제’를 내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은 갑자기 말을 바꿔, 아니면 방법이나 순서를 바꿔, 기업이 잘돼야 국민 경제가 산다고, 국민 경제가 살기 위해서 노동자는 ‘개혁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노동자는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자본과 노동의 힘이 균형을 잃으면 민주주의는 위협을 당한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정부의 약속 또한 그 약속의 유효성만큼이나 내용도 정말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했다.
민주주의가 전체 국민의 의사 결정의 정합성과 기회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면, 적정 규모라는 게 없는 경제 활동에서 시장 경제의 속성은 어떻게 조정될 수 있을까.
한미 FTA 경우에서 보듯 국민이나 여론을 무시했고 심지어 국회는 문제의 복판에 스스로 있지도 않았다.

정부가 끊임없이 얘기하는 ‘발전’의 정체는 무엇이고, ‘발전’의 관념은 무엇일까.
일본처럼, 미국처럼,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여타 유럽의 국가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건가.
혹시 이들의 얘기는 터무니없는 오해나 착각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여 온 ‘발전’이나 ‘성장’을 향한 모델이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를 문제 덩어리로 만든 전형이 아니던가.

성장 또는 발전의 관념은 마구잡이로 자원을 끌어다 쓰고, 물과 공기를 더럽히면서 총체적 환경을 파괴하고, 심지어 우리들 의식까지 자꾸 소외시키고 있는 형국인데.
찬찬히 생각을 해보자.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발전’은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다음의 세대에까지 파멸을 향한 행진을 하게 하는 것은 혹시 아닌가.
과연 우리들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경제 문제가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의 실존이란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 문제로만 일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오직 돈만 벌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이 사람들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넓은 아파트에서 한 세상 살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경제 문제를 화급하게 개선시키겠다는 현실 인식이 지나쳐, 삶의 모든 문제를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으로만 파악하여 경제만이 존재의 전부인 양 강요하는 생존 방식의 주장은 참으로 위험스럽다. 이는 국가 경제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쯤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인식의 착란을 현실로 받아들이겠다는, 또 다른 전체주의의 혐의가 짙다.

차라리 위기의 본질은 경제가 아니다.

경제를 걱정하지만 경제의 수단과 방법, 목적을 혼돈하면서 경제 실천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문화의 위기이다.

이 문화의 위기는 우리들 삶의 현상에서 빚어지는 무수한 갈등과 마찰, 부패의 구조적인 일상화와 그런 일상에서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고통과 인간 내면의 황폐화를 뜻한다.
공해와 오염, 무감각한 자연 파괴, ‘발전’의 논리를 앞세운 부조리한 실체들 앞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습한다는 역대 정부의 태도가 임시적인 땜질로 대강대강 눈가림하겠다는 일련의 얕은 정치적 대증적(對症的) 태도라는 점에서 위기의 심각성은 더 한층 깊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정권을 맡겠다고 나서고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은 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 땅에서 벌어지는 반생명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지금 국민들의 고통은, 사람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실존의 문제에 맞닥뜨려 있다.
과연 차기 정부는 이 땅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일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투표에 참가하여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은 바른길을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대로 진행된다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서 흘린 피를 욕되게 할 뿐이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