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는, 13 -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그네들의 신문 창간일에 "역사와 국민앞에 저지른 죄상을..."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08-07 08:49     조회 : 7450    
타락의 저널리즘
정권과 언론의 유착만큼 썩은 건 없다.

정권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인 방법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 언론과 관계해 왔다.
때때로 언론도 뒤집어서 이 관계를 사용했다. 세제와 금융상의 특혜는 공공연하기까지 했다.
언론인들이 정권의 요직으로 발탁 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이 땅에서는 차라리 익숙한 형식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서 메이저 신문 권력에 빌붙는 노골적인 방식은 택하지 않았지만 인터넷 언론과 방송 언론과의 유착 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또 다른 유착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신문사의 경우 경영과 소유와 편집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소유가 편집권을 훼손하는 건 너무나 간단하다.
신문사도 갈비집 운영하듯이 ‘집안사업’ 정도로 알고 있다.
80년대는 신문사가 대기업이 됐다. 군사독재권력이 강제 언론통폐합으로 독과점을 만들어 준 결과가 됐고, 이 사업 저 사업으로 길도 열어줬다.
한국방송광고 공사의 방송 광고 영업 독점으로 만든 ‘언론 공익 자금’은 이 땅에 언론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신문언론이 권력기관이 된 건 오래전이다.
일반여론도 얼마든지 만든다. 그래서 무섭고 더럽다.
신문지를 펼치면 5개 재벌회사들의 광고가 거의 매일 눈에 들어왔다.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이다.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에서 신문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했고 못하다.
이 모든 피해는 누가 입을까?
시민이고 국민이고 국가이며 언론 자체다.
권력도 해롭고 신문사는 시간이 갈수록 부실해지고 곧 망하는 수가 생긴다.
 
신문마다 신문의 논점이 하나같이 별 차이가 없다.
이념도 불확실하니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신문사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게 신문의 속성상 그 출발이기도 하다고 얘기들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     

절대 다는 아니지만, 일부 기자들은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직접 만나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전화통 붙잡고 기사를 쓴다, 오보가 나면, 그럴 수도 있다, 는 식은 너무나 당연하다.
젊은 애들도 ‘완장’을 하나씩 차고 돌아다닌다.
전문 기자직제는 고사하고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만능기자를 꿈꾸게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면서 쓰레기 같은 이력만 쌓는다.

특파원이라고 나가들 있지만, 그들의 안테나는 나가 있는 주재국에 있는 게 아니라, 거의 국내에 있다. 대부분이 어학력이 떨어지니 주재국 취재원에는 아예 접근이 안 된다.
열심히 귀동냥하거나 그 나라 뉴스도 듣고 보고, 그 나라 사건 현장 속으로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길도 모르고 방법도 모른다. 사전 찾아보면서 남의 나라 기사를 요약하는 수준인데, 그 정도라면 비행기 타고 나갈 것도 없이 인터넷이 훨씬 빠르고 값이 싸다.
서울에서 대기업체 고위간부나 고위 공무원, 정치인 등이 나오면 같이 술이나 밥을 먹으면서 친분을 쌓고, 훈수 같지도 않은 훈수를 주고받고 국내정치가 어떻고 떠들면서 보낸다. 그러면 후딱 2,3년이 지나가고, 다녀와서는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라고 비분강개를 하거나 좀 부지런을 떨면 책도 한권씩 써댄다. 물론 절대로 다는 아니다. 그 반대로 제대로 직분에 충실한 특파원 기자들도 있다.

정치부 기자는 정치를 취재하는 기자가 아니고 정치인들의 사적인 기자들이다.
정치부 기자가 누가 누굴 만났고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고 등은 기사의 1차 자료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냥 그게 기사다.

문화부는 보도 자료가 대부분 요약돼서 또는 자의적으로 압축되어 그대로 기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정실이나 연고주의가 우선이다. 문화의 분야 분야를 전문적으로 잘 모르지만 한 2년 기자하면 다 아는 것 같고, 한 3년 하면 전문가가 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얕은 문화 현실도 있지만. 공부도 숙제도 취재 직전에 사전 조사도 필요 없다.
다 알아서 취재원들이 도와주니까.
‘설레발 잘 치고 말 빨 센 놈’이 어디가도 튀는 게 한국 사회지만, 문화 예술 분야는 보통 이게 먹히는지 남의 나라 것이나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창작이라고 내세우면, 그게 창작인 줄 안다.
한 번 부풀려지기 시작하면 확인도 하지 않고 어느 날부터 대가가 된다.
그러면 저절로 굴러가게 구조가 돼 있다. 해당분야의 역사를 잘 모른다, 공부를 안 하니까 자료도 잘 안 찾는다, 바쁘니까 외국 자료만 대강대강 보면 기사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물론 열심히 제대로 꼼꼼하게 겸손하게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다.

정부 부서 출입기자제를 브리핑제로 바꾼다고 떠든다. 실효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노무현 정부가 출입기자실을 통폐합하겠다고 나섰겠나, 하지만 방법이 틀렸고 수가 뻔히 보였고 역효과만 초래했다. 머리가 아주 나쁜 경우이다. 진짜 제대로 된 참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론을 개혁' 운운할만한 실력도 배짱도 치밀함도 없다. 다분히 감정적인 조처로 보였고 그 결과도 헛일로 예상된다.

문제는 언론의 인식과 이해의 문제이다.

언론을 보자, 해당 부서의 현장에, 국민들이 관계하는 현장으로 기자들이 찾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부서 기자실이나 공무원들 방에 수시로 들락거리면 기사가 만들어진다는 관행이 여전하다. 
해외 출장 기사는 해당 관여 정부 부서가 주재국 대사관이나 영사관 또는 국공립기업이나 대기업들의 지사 등에 연락, ‘현지지원’을 받게 된다. 그들이 주는 정보가 거의 ‘해외 취재’다.
물론 절대 다는 아니지만 말이다. 취재 여건이 열악하고 시스템이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오로지 ‘기자 정신’하나로 버티면서 최선을 다 하는 기자들도 난 봤다.
군사독재권력에 다가갔던 언론인 중에서 참회나 진실한 반성, 스스로 자기를 고발하는 이야기는 들어보기가 힘들다. 언론인이 무슨 지사(志士)이기를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내부에 혹독한 갈등과 분열을 다반사로 경험하고 있다.
여론을 생산하는 신문도 이 편 저 편으로 갈려서 조건반사적으로 나와 상대를 규정한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그네들의 신문 창간일에 "역사와 국민앞에 저지른 죄상을 스스로 사죄합니다" 는 식으로 특집판을 만들어 스스로 어떻게 민족과 역사를 배반했으며 스스로 어떻게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그네들이 스스로 밝힐 수만 있다면, 이는 한국 언론의 전환이며 획기적인 하나의 가능태(可能態)이다.

문제는 신문 언론 스스로가 현실의 가능태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에 매몰되어 있다. 그저 ‘내편이냐 아니냐’ 로만 말이다.

이제 한국의 신문 언론은 매일 매일의 뉴스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나쳐서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나, 우리의 시선이 잘 돌아가지 않는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위기들을 해부하여, 그 근원을 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언론이 필요한 때가 왔다.
이념을 정확하게 표명하고 자기 입각점을 분명하게 하는 성숙한 신문을 볼 때도 됐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왜 일어났는지, 근원적인 접근으로 더 깊은 원인들과 까닭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눈을 이젠 한국 신문 언론에서도 만날 때가 됐다. 

문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치고 나가는 역할은, 대중지가 과잉된 흥분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 차분하게 현실을 해석할 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음을 확인하는 신문을 볼 때가 왔다.
신문 기사 용어는 암암리에 기득권의 입장을 강화하는 측면의 용어나 기존의 기왕의 잘못된 관념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용어들이 무비판적 무의식적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경계해야하는 때가 이젠 됐다. 언어의 기만성을 분별할 수도 있고, 용어나 말이 의미하는 경제 사회적 문화적, 심지어는 생태적 시야에서도 따지고 가려져야 하는 때가 이제는 왔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도 21세기 문명의 전환기에서는 예민하고 빠르게 다각도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사회의 문제들은 개별적이라기보다 중층적 복합적이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전면적이다.
이제 우리도 문제를 입체적으로 보는 시야의 언론을 가질 기회가 오지 않았는가.
싸잡아서 묶어서 양비론으로 비켜가는 언론보다는 관점을 명확하게 하고, 대중의 몽매주의에 의존하기 보다는 대중을 끌어내고, 토론시키고, 참여시키는, 그런 역할을 하는 그런 언론을 볼 때도 이젠 지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의 전파를 누가 만지고 있는가.
문제는, 방송을 이용하는 정치와 경제 권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 도덕성에도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듣고 보자면, 국민의 보통이하의 머리 수준에서 방송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 든다.
방송 관계자들 스스로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 방송을 해야 알맞다’느니 하면서, 국민들 알기를 함부로 우습게 여긴다.
이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있는 자기네들이 중학교 3학년 수준’이면서 도리어 국민을 깔보고 얕잡아 보는 말이다.
몇 천억의 예산이나 경비를 쓰면서, 뉴스 보도는 조간신문에서 이미 다 본 것을 대부분 ‘그림으로만’ 다루는 수준이라 새로울 게 있을 턱이 없다.
‘보도지침’은 사라졌지만 ‘내부 보도지침’은 아직도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항상 신문을 뒤 쫒아가거나 누가 다루기 시작하면 아예 관심도 없다가 일제히 달라붙는다.
독자적으로 사건을 고르는 시야가 열등한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 누군가가 제대로의 취재를 방해하거나 못 다루게 하고 있는가. 아직까지?
직원을 뽑을 때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 뽑는 건지, 아니면 방송국을 일단 들어오면 그 수준으로 전락하는지. 물론 사회의 반영이지만,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창의성이나 진지성 진실을 찾아가는 힘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웃기는 얘기지만, ‘뉴스를 읽는 아나운서’ 를 언제부턴가 ‘앵커’라고 자기네들끼리 그렇게 부른다.
‘앵커’의 역할이란 기사 취재권, 편집권, 논점독립, 헤드라인 선택권 등이 있는 선진국에서 얘기되는 그런 ‘앵커’로 그들은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일본 텔레비전의 프로그램들은 한국 텔레비전의 교과서가 된지는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최소한의 국가관이나 염치, 인간으로의 자존심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일본 것을 막 베낀다. 보도, 교양, 오락, 드라마 할 것 없다.
프로그램을 단위로 묶는 명칭들, 보도니 교양이니 하는 부서 명칭도 그렇다.
방송체제나 시스템이 거의 일본의 30년 전 쯤 틀을 ‘빌려 온’ 경우이고 아직 그대로 이다.
하나하나의 프로그램을 보자면 포맷, 구성, 형식, 편집 및 카메라 워킹 스타일, 방송 시간대까지 거의 흡사한 사례들도 있다. 
이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국가가 절대 아님을 방송 관계자들은 뼈아프게 알아야 한다. 
 
일본 도쿄에 장기간 가 있을 때다.
한번은 시간을 내어 일부러 일본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일본의 현재를 알고자’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15개의 공중 채널과 6개의 위성방송을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가면서,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본 적이 있었다. 
일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일본은 무엇에 관심을 지니고 사는가. 일본은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며,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어디까지나 단면이지만 일본을 잠깐이나마 보는 방법이었다.
교양 프로그램 수준은, 드라마 수준은, 오락 프로는, 들리는 말처럼 저질이고 선정적이기만 할까.

일본의 뉴스는 거의 리얼타임으로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사건이 생기면 신속하게 특파원을 현장으로 보내 세계 각지를 현지에서 커버하고 있다.
국력과 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밤 12시 이후부터 민간방송에서 내 보내는 저질 프로그램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민망했다.
밤 시간대 민방 텔레비전은 일본에 하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방은 가열찬 경쟁 속에서 선정성으로 흘렀는데, 모멸감을 느낄 만큼 유치한 수준도 있었다. 그러나 오락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재미있고 건강한 것들이 꽤 있었고 어떤 프로그램은 감동을 의식해서인지 억지스럽지만 진지하기도 했다. 국내 텔레비전에서도 언제 일본서 ‘가지고 왔는지’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게 눈에 띤다.
드라마, 특히 NHK 아침 드라마는 일본인들의 정서랄까, 일본인의 삶 속에 스며있는 서정을, 삶의 결을, 한 시대의 예의같은 모습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매일 펼치고 있었다.
대부분 스튜디오 위주의 촬영으로 조명이나 세트가 그들 특유의 미의식을 깔끔하게 보여주었으며, 카메라도 조용하게 움직였다.
NHK 역사 드라마는, 이따금 역사 해석에서 논란거리도 불러일으키면서 일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구성이 탄탄하고 작가층이 꽤 두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술 등에서는 상당한 기술 수준이 엿보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NHK 종합뉴스 시간, 뉴스를 시작하기 직전의 뉴스 타이틀백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7,8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 텔레비전의 뉴스 타이틀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여 지구의(地球儀)가 빙글빙글 돌고, 색깔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현란하고 화려한 그래픽 쇼로 영상이 전개되고, 음악은 팡파르가 울리는 등 이즈음의 한국 텔레비전 뉴스 타이틀처럼 요란스럽게 시작했었다.
한국의 텔레비전 뉴스 타이틀이 지구의가 돌고 마치 세계 뉴스를 직접 끌어당겨서 볼 수 있는 것만 같은 야단법석을 떨면서 시작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일본 텔레비전 뉴스 타이틀은 조용하게 단순하게 정적(靜的)으로 시작한다는 느낌이었다. NHK 밤 10시 종합뉴스의 타이틀백은 시간을 간단하게 알리고, 조용한 첼로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새가 한 마리 나무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그림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텔레비전의 뉴스가 타이틀은 요란하지만 국내 뉴스 일색이거나 뉴스 말미에 송신받은 외국 텔레비전 뉴스를 내 보내는 것에 그치는 반면, 일본 텔레비전은 현장의 시각과 리포터의 시각, 뉴스 데스크의 시각이 번갈아 교차 편집되면서 빠르게 진행되었다.
뉴스 내용은 세계 각지의 특파원들이나 취재기자를 인공위성으로 직접 불러내어 현지시간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을 얘기하는가.
일본이 세계의 복판에서 뉴스를 진행하고 운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가 돌아가는 변방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중앙에서 뉴스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현실 감각이랄까, 돌아가는 시간의 템포가 조밀하게 느껴지면서 세계의 사건에 방관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국력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에너지를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내실이 없다. 껍데기만 요란하고 알맹이는 비어 있거나 남의 것을 빌려와서 채우고 있다.
NHK의 타이틀백이 세련되고 세련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 미디어가 자기 나라의 시간 공간을 해석하는 능력, 또는 대중의 시간 공간 템포를 한 박자 한 호흡 내려 앉히고 냉정하게 뉴스 현실을 시청하게 하는, 정서를 뒷받침하는 일본 텔레비전의 시간 공간 연출력이다.
미디어가 들떠서 시끄럽게 우왕좌왕하기보다는 그 나라의 정서적 흐름을 포착하거나 리드해 나가는 역할에 알게 모르게 관여한다는 점이다.   

NHK에서 방영했던 <일본의 100년 이후>라는 특집은 100년 이후의 일본의 제반 국가 조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기상학자, 인류학자, 정치학자 등 광범위한 인력이 동원되어 일본의 현재와 미래 100년을 훑어 나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00년 후에는 기상 이변으로 해수면이 높아져 도쿄 만의 바닷물이 도쿄 도시전체 3분의 1쯤을 물에 잠기게 한다는 과학적인 분석을 하면서, 이외에도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일본은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할 것인가를 광역적인 조사와 통계분석을 통해서 대중들과 같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도쿄가 물에 잠긴다면 서울도 지대가 낮은 지역은 바닷물에 상당부분 잠겨든다는 얘기가 된다.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특집으로 내 보내고 있는가?
제작 능력이 없거나 예산타령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외국에서 만든 다규멘타리라도 제 때 제대로 내 보낸다면.

우리의 대중 미디어는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며, 과거를 정리하는, 그런 역할은 거의 포기한 것 같다.
군사독재시대 때야 귀멀게 하고 눈멀게 해서 그랬다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은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의 문제가 아닌가.
미디어를 저급하게 사용하는 도구로만 알고 있다면 그것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곧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다면 진실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텔레비전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저쪽으로 치워 버리고 천박한 관심과 조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말 장난과 말 비틀기, 말을 학대하고 말을 남용하면서 몸뚱어리를 흔들고 카메라는 따라서 흔들거리고 돌아다닌다.
카메라를 흔드는 건 우리 정서에 전혀 맞지 않다. 빠르고 폭력적이고 일부러 자극을 주려고 조악하게 카메라 워킹을 하는 건 일본 민방의 영향이다.
모 민방이 생기고부터 다른 텔레비전 방송도 휩쓸려 가고 있다.
시청률만 올라가면 카메라 문법이니, 구성이니, 내용이니, 수준이나 질은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방송 미디어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데스크나 경영진의 사고에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전두환 정권 때 안기부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체제옹호 드라마를 찍던 프로듀서가,
문민정부에서는 5.18 광주를 배경으로 한 정치드라마로 하루아침에 의식 있는 드라마 연출자로 둔갑을 한다.
5공 때 땡전 뉴스를 지휘하고 스스로 나서서 뉴스를 조작하던 이가 지금도 버젓이 경영진으로 또는 방송 책임자로 앉아있다가 국회의원을 하는 나라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 낮고 표리 부동하며 부패한 사람들이 방송인들로 대우받는다. 얼굴이 알려지면 국회의원이나 관직으로 자리를 옮기고, 깡통처럼 소리 내어 시끄럽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한테는 카메라와 조명이 다가가고, 그 자체가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인식된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면서 전문가연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 미디어는 우리 사회의 진정성이나 가치매김을 헝클어 놓고 있으며, 대중에게 정말 필요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인식을 방해하고 흐리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걱정일까.
미디어 지향의 지식인들이 판을 치고, 미디어나 저널리즘의 찌그러진 구조에 편승하여 민주주의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에 방송이 있다면, 이는 우리 공동체의 적이다.
정작 대중은 미디어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개혁을 할 것인가.
제도나 시스템의 개혁이 먼저 있어야 하겠지만, 능력있고 정직하며 눈이 밝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경영을 개선하며 소신이 있으면서 방송 미디어의 역할과 기능 앞에 겸손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전파 경영에 다가가야 한다.
출세나 생각하고 시청률만 생각하는 방송 날품팔이꾼들에게서는 전파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환경으로 빨리 전환시켜야 한다.

언젠가 한번, 우연한 기회에 일본 텔레비전을 모방하는 유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한 프로듀서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왜 좀 더 진지한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느냐고, 똑똑하고 잘 나간다는 그의 대답이 나를 아연케 했다.
“불특정 다수인 대중은 심각한 걸 싫어한다, 그저 웃기고 흔들면 된다, 대중들의 수준에 프로그램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현실 논리’를 냉소적인 얼굴로 설명했다. 오만이고 독선이다.
 그가 대중을 아는가? ‘불특정 다수인 대중’을? 그 대중이 그저 ‘웃기고 흔드는 취향’ 만 좋아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가 그런 식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더라면, 차라리.

삶을 산다는 건 감각의 상투적인 연출이나 장난이 아니다.
지저분하고 조잡하며 더러운 머리들에게 대중의 미디어를 맡길 수는 없다.
더욱이 세상살이가 힘들며 삶이 팍팍하고 어려운 대중들에게, 방송은 진실을 전달하고 올바른 정보와 양식을 제공하며 삶의 또 다른 원천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의 방송 식민지가 아니다.
이제 텔레비전은 정말 중요한 것을 제 때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예민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방송은 프로페셔널의 원칙을 제대로 다시 세워야 한다.
물론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선의 프로그램과 보도를 통해서 우리들 삶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다. 때때로 놀라움과 감동을 받는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존경과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차기 정부는 언론정책에 대한 확고한 입각점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이 철저하게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잘못된 관여가 도리어 화를 키우고 세만 키워주는 경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언론 스스로의 자율과 정책의 개입이 조화로울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