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는, 19. 민주주의 실천과 사유를 위한 '실사구시'를 이해해야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08-07 09:27     조회 : 8150    
실사구시적 민주주의

먼저, 다시한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대한 관용적 오해부터 바로 잡고자 한다.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실사구시를 경제성, 효율성 정도로 이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지금 대표적으로 실사구시를 오용하는 경우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소위 말하는 '도로 열린우리당'또는 범여권(?)의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는 손학규이다. 그가 이해하는 실사구시란 오용의 정도를 넘어 천박하다. 국어사전적 의미로도 실사구시란, '실제로 있는 일에서 진리를 구함. 곧, 공리나 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에 따라 과학적으로 밝히려던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 태도로서, 조선 때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라고 쓰여있다. 나는 그럼 실사구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실사구시를 '자연성'으로 이해한다. 
벌써 200년도 더 이전에 조선의 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은 그의 서책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곡물의 성장에서 열매가 맺기까지 진(眞)과 실(實)의 과정이 실사구시(實事求是)라 하였다.

따라서 재차 얘기하지만 실사구시는 현실의 효과와 능률, 경제성의 태도만을 따지는 입장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실사구시에 대한 오해는 실사구시를 기능적 합리성 이란 근대성의 측면으로만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사구시는 식물의 생장에서 보듯이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자연성에, 제대로 어울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에 실사구시의 정치란 실심(實心), 실업(實業),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사회적 약속에 근거하는 정치이다.
실사구시에서 인간은 지행병진(之行竝眞), 언행일치(言行一致) 하라고 선인들이 일렀다. 벌써 옛 날에 우리들의 선인들은 무서운 주문을 우리들 후손들에게 했다. 
그렇다, 실사구시의 눈으로 행해야 한다.

이런 실사구시에 기초한 개혁이나 혁신이란, 사람이 더불어 더 나은 삶을 살만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며 갈등과 분열의 현실을 줄이거나 끊어내고 우리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최적화(最適化)시키는 능력의 문제이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후손들에게도 삶의 가치를 전수시킬 수 있고 새로운 시대 인류의 삶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만들어 내는 우리들 입장과 역할이 그 기본이다.

그렇다면 개혁이나 혁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들 삶의 방식을 꼼꼼하게 문제 삼으면서 우리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에 진지한 물음을 가져야만 할 때다.
 
이에 실사구시의 가치는 자연성, 존재의 본원성에 근거하는 국가기반으로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한 계속적인 물음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져야 할 가치이다.

정치나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교묘한 방식으로 국민들을 소외시키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나 미국의 변덕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 처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21세기 국가 구상의 단서는 총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현실과 냉정하고 정당하게 실사구시로 대면할 것을 전제로 한다.

오직 반대만을 위한 반대가 아니라, 잘못된 정치에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단호히 반대하면서, 노골적으로 불균형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형편을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우리들 삶을 일으켜 나가는 태도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시민들은 바르게 생각하는 세계 인류들과 손을 잡고 파괴를 막을 수 있는 정치로, 현재의 삶의 정치적 조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정치로 그 역량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

정부와 정치가는 자신의 좁은 목적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는 건, 당장의 어떤 결과는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 사회에 깊이 각인(刻印) 되어 있는 부패와 탐욕, 무차별한 경쟁과 반인간의 요소들은, 힘 있는 자들의 횡포를 제도적 문화적으로 금제하는 정밀하고 이성적인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 붕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공산체제의 붕괴와 실패는 그 체제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악(惡) 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는가.
그 체제의 무너짐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치명적인 결함 때문임이 아니던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금력이 겨우 극소수의 인간들에게만 사용된 사실에서 그들 체제는 서서히 그리고 일제히 무너진 것이다. 
혁신한국의 실사구시는 효율과 효능의 문제만 살피는 태도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깊은 본성을 응시하는 인간의 태도여야 한다.


식물에 대하여 
식물도 공격한다.
그러나 나는 공격을 받는, 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작은 식물에 대해서 말한다.
그 중에서도 아주 연약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속에서의 작은 뿌리의 움직임과 뿌리의 형상들 그리고 지상의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변화, 그것의 연속적인 흔들림들, 이처럼 식물이 지니는 시간의 변화와 움직임을 차분하게 생각하고 응시해 본다.

식물은 식물의 본질에서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가지와 잎이 빛을 받아들이는 빛의 흡수성과 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뿌리의 속성인 빛의 역흡수성일 것이다.
잎은 빛을 쫓아다니지만 뿌리는 빛을 쫓아내는, 이것 말이다.
자연이다.
그 사이 나무줄기는 이 빛의 흡수성과 빛의 역흡수성 사이에 자리 잡아 줄기는 곧장 수직으로 상승하여 식물이 움직이지 않고 지탱하도록 도와준다. 
 
이런 생태적 속성의 자연인 식물의 운동을 바라볼 때면, 자연스럽게도 빛과 시간은 내 시선 앞에서 조용히 차분하게 마주하기 시작한다.
고요하다.
변화의 본질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삼투(滲透)로 스미게 마련이다.
식물의 시간,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 인생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시도인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식물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의 눈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
이 의문은 사실 역설이지만 차라리 식물이라기보다는 식물을 통한 인간이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잠시, 뿌리에서부터 생각해보자.
나무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어 땅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볼 수 없는, 그 뿌리는 나무에 자양과 안정성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어둠과 대지의 요소인 뿌리의 근거는 우리의 상상력에서 뿌리가 삶과 죽음의 기이한 종합이라는 일단의 해석도 가능하면서, 아울러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미시적으로 채집을 해 나가는 촘촘한 능력으로 분명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뿌리는 땅속에 있으면서도 강력하고도 은밀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땅 밖의 나무에, 줄기에, 잎에, 성장을 부추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무를 볼 때 땅 밑에 나무의 뿌리에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게 마련이다.
나무의 겉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출렁거림은 때때로 우리의 시선이 머물지만 그 밑에 땅속에, 대지 속에, 근원적인 근거인 뿌리에 대한 상상은 우리들 마음의 눈으로만 보인다.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 성(誠)은 ‘진실하여 속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라고 하였다.
誠者, 眞實無妄之謂也,

식물의 열매를 실(實)이라고 한다.
식물은 햇빛과 흙과 물이 있어야 싹이 돋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정직한 생장이, 이 자연이, ‘성’이 아닌가.
이 ‘성’이 곧 실사구시이다. 
식물의 시간을 통해서 열매가 맺고 생장과 소멸의 시간을 보듯이, 우리들 인간의 삶도 더 간단해야만 자연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음을 읽는 실사구시가 21세기 국가혁신의 단서다.

여기에 근거하여 21세기 한국이란 국가의 철학적 인문적 상상력이 현실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 가장 미니멀한-최극소한- 자기 실재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그 시작이다.
허학(虛學)과 흉내내기의 엉성한 차학(借學)이 아닌.

8월 하순부터 이따금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이 게시판에 올리고자 한다.
이는 21세기 문화국가를 위한 원칙을 밝히는 단서(端緖)에 해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