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 배추를 통한 정치 경제학 - 리얼리즘, 탈리얼리즘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08-21 10:04     조회 : 8398    

사진 작가- 문순우 론

내겐 낯선 이름이었다. 문순우란 이름은.
그러나 파리에서 그의 사진을 소개받고 처음 보는 사진작가 문순우의 사진집은 빠르고 흡인력 있게 내게 ‘읽혀져’ 왔다. 마치 하나의 발견처럼.
그리고 훌쩍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1998년 쌀쌀한 겨울 어느 날 저녁 느즈막에 문순우를 만날 수 있었다.
그 간 문순우는 강원도 산골에서 무와 배추를 찍었다고 했다.
몇 년 동안의 독일ㆍ폴란드ㆍ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겨울이면 내내 갈라 터진 밭 귀퉁이에 올라서거나 쪼그리거나 엎드려서 지냈다고 했다.
얼어 터진 무와 배추를 찍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나는 무와 배추를 찍은 40여 점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스트레이트한 영상에서 보여지는 뒤틀린 식물들의 흑백의 판각(版刻)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계절을 넘겨 버리고 팽개쳐진 채로 그대로 버려져, 단단하게 언 땅 위에 찰싹 붙어 깔려 있는 얼어 터진 무와 배추의 영상은 마치 죽음의 시간(時間)과 시간(屍姦)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무와 배추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문득 한국 사회를 통괄적으로 가로지르는 문순우의 정치 경제학적 인식의 산물(産物)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민들이 수확을 스스로 포기한 한겨울의 무와 배추는 1999년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의 산물이면서, 매일같이 우리가 일용하는 야채나 식물이 아니라 문순우가 다시 뽑아내어 들추어 주고 보여 주는 문순우의 정치 경제학적 해석에 의한 무와 배추였다.

미술의 표상이 끈덕지면 우리는 종종 호흡을 고를 때가 있다.
나는 문순우가 찍은 죽은 식물 앞에서 일그러진 생태적 정물을 마주하고 숨을 잠시 쉬었다.
대상이나 세계를 긍정하는 수많은 사진들로부터 한 발 비켜서서, 대한민국 인간사의 현재를 관통하는 흑백의 죽은 식물 무와 배추에서 나는 죽은 사회, 죽은 경제, 죽은 정치의 오브제를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어떤 예술에는 또는 어떤 사진에는 전혀 사회적 긴장이 없다.  의식적으로도 그 긴장을 멀리하며 심지어는 부정하기까지 한다.
어떤 예술은 간단한 상품처럼 내놓고 소비되기를 희망하면서 심지어 흥행만을 꿈꾼다.
판매의 매음(賣淫)은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잘 팔리는가, 사람들이 알아주는가, 일간지 문화면에는 자주 오르내리는가, 때때로 텔레비전에 등장하여 예술로 소위 ‘예술가’로 이야기되는가.
한국적 특이 현상인 대학 교수와 예술가라는 껍데기 성공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가.
물신(物神)의 과도한 욕망의 부추김은 소비의 미덕으로 코드화되기 시작한다.
이젠 노골적으로 예술도 별 것 아니고 그저 상품일 뿐이라고, 그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사진은.

그러나 어떤 예술은, 어떤 사진은 늘 사회적 긴장 한가운데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팔리든 말든,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찾든 말든, 대학 교수가 되든 말든. 작가 문순우가 특정한 심리적 태도를 지니고 특별한 사회의식의 결과로 사진을 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진에서 사물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힘을 느낀다.
그냥 무심코 스쳐 지나 버릴 수도 있는 한겨울 밭에 얼어 터져 버려진 무와 배추를 끈덕지게 보는 힘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힘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 사진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으며, 사진가들은 어떤 취급을 받기 원하며, 사진이 어떤 입장에서 무엇에 쓰여 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랑곳없이 문순우는 혼자서, 자기 속에서,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시간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신중함을 본다.
비록 죽은 식물이지만 문순우의 시선에서는 멈추고 정지하고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숨쉬며 생동한다.
그의 의지에서 그의 영상은 시(詩)로 화답한다.
여기에서 나는 문순우 리얼리즘의 메타포를 보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현실을 암시하고 이해하며 드러내 보이는 힘은, 현실에 대응하면서 근본적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작가적 본성에 있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노력은 반복, 연속, 중첩되는 구체적인 영상들의 운동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는 강렬한 영상의 에너지를 감각(感覺)하게 한다.
우리의 삶에서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자연조차도 경제적인 가치 속에 종속된 지 오래다.
무엇을 팔 수 있을까.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줄기찬 생산에 대한 미신도 문제지만, 제 값으로 팔리지 못한 무와 배추를 뽑아내고 갈아엎어 새봄을 준비하지도 못하는 겨울 밭의 울음들은 곧 파탄의 징후다.
농민이 거두어들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무와 배추는 생산의 거부이면서, 리얼리즘의 은유로는 격렬한 죽음의 시체일 뿐이다.

농민이 수확을 포기한 것은, 제대로 값을 받아 내지 못하는, 흘린 땀을 욕되게 하는 물건은 단호하게 소멸 처리될 수 있다는 생산과 소비의 등식에 기초하고 있다.
겨울이 지나가도록 땅 위에서 썩고 있는 무와 배추를 찍은 문순우의 작업에서,
그가 직시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물음은 ‘죽음 또는 주검은 삶의 끝에 도달했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이미 스멀스멀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을 사람들에게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엿볼 수 있었다.

삶은 시간을 끌어당겨, 즉 확장시켜 살아 내는 것에서 그 의미를 말할 수 있다.
더구나 한 공동체에서 삶의 진정성이란 정치ㆍ경제ㆍ시장(市場)의 민주성을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는가가 그 요체다.
과잉 생산도 문제지만 생산과 유통의 바른 흐름이 왜곡되고 찌그러질 때 나타나는 한국 사회 농촌의 파탄과 비참과 아울러 그 정체의 실제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바로 이 순간에 문순우의 눈을 통해서 마주하게 된다.
문순우의 리얼리즘은 버려진 무와 배추에 빛을 쪼여서 시간을 포착하고 현실을 전달한다.
그의 상상력의 영상은 무서운 현실의 구도(構圖)를 그려 낸다.
정작 자신은 전통적인 카메라 구도를 외면하고 버렸지만, 그의 사진은 강원도 인제군 북현 원동리나 강원도 평창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 주면서, 21세기 인간과 식물의 상관적인 그래픽을 목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의식에서 직관으로 파고들어 간 대상인 무와 배추는 또 다른 비유와 연상으로 확장된다.
이는 한국 사회 농촌 현실의 피폐성을 말한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사진으로 보여 지는 격렬하고 명징(明徵)한 무와 배추의 주검들을 통해서 현실의 실제를 통한 상상과 상징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현대 소비 사회에서 땅의 생명이나 땅의 힘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거친 속도로 경제의 생산 단위로만 축소되었고 가치의 진정성은 굴절됐다.
무와 배추는 소비자라는 상상 대상이 있어야만 심어지고 길러지며 거두어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여기저기 가득히 밭을 채우고 넘쳐 상상 대상인 소비자의 필요를 넘어서서 과잉 집적된다.
여기서 비극은 계절을 넘기고 피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동의 충만함 뒤에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의 공허란.

문순우의 사진에서 우리는 생산ㆍ축적하고자 하는 데서 흩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하나하나의 대상을 마주하고서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인 격리와 결핍을, 꽉 차 있어서 충분해 보이지만 그 속성은 허허한 공백임을, 부서져 내리고 뭉개졌지만 뒤틀리고 비틀어져 생명에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읽게 된다.
이처럼 문순우 리얼리즘의 정당성은 무와 배추라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식물의 물질성의 환상과 상징을 경험시키면서 이를 ‘사회적 실제’의 담화로 연결시키고, 아울러 상상적인 세계의 의미론적인 물음을 통해 냉정한 현실의 실제를 다시 새롭게 보여 주고 있다는 역설에 있다.
죽은 식물에서 시간의 확장을 끌어내고 시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문순우 카메라 렌즈의 차갑고 간단(簡單)한 빛의 집조(集照)는, 그의 영상 작업이 개인적 실존의 깊이에 상관하는 체험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사람들 속에, 사회 속에, 사람들 사이에 바람직한 관계 항(關係 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관심의 촉발이다.
생명력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는 것들을 밝히고 찾아내어 영상으로 보여 주는 의식의 힘이란, 곧 사회적인 인과 관계의 복합체를 발견하며 사회가 처해 있는 인간의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발견하고자 하는 섬세한 시도가 아닌가.
그가 주소를 옮겨 강원도 산골에서 무와 배추를 찍고 있을 때, 개인적인 그의 영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사회와 자연의 현재를 묻는다.
이는 개인적 체험에 철저하면서 보편의 문제를 응시하는 자세이다.
상처 입은 대지(大地), 상처 받은 식물을 보여 주는 그의 영상은 결국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땅, 잃어버린 인간을 향한 세밀한 포효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인 몸뚱어리를 포함하는 자연 환경을 함부로 여기는 태도와 그런 식의 정치 경제가 아무 자각 없이 지속된다면, 이미 스스로 자신을 끝장내고 말겠다는 형세에 다름 아니다.

문순우의 강원도 촬영지를 따라갔다가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에 4차선으로 새 도로를 내기 위해 산을 함부로 파헤쳐 수직으로 기우뚱 기울어져 있는 황폐한 모습을 보았다.
순간 갑자기 내 몸이 아파 왔다.
문순우가 아무 말 없이 차창을 열어 한겨울인데도 차가운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은 내 몸의 화기와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이 썩으면 땅도 썩고 물도 마르며 나무뿌리는 비틀어진다.
산은 무너지고 바위는 부서져 내린다.
무와 배추가 썩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이렇듯 무너지고 썩은 무와 배추를 찍는다는 건 절망을 찍어 생명에 대한 갈구를 기원하자는 것이고 반듯한 정신을 일깨우자는 의지다.
이런 입장에서 문순우의 사진을 보면, 고통을 영상으로 찍어서 사진의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하는 문순우 특유의 의식을 볼 수 있다.
이 의식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각의 장난이나 낯설게 보이기 위해 디자인적으로 변용된 사진의 요소가 아니라, 실재하는 그의 몸을 통해서 구현되는 파동이다.
그가 강원도 산골의 비바람을 맞으며 살을 에는 겨울 밭에서 서성거릴 때 그의 몸은 이미 그의 눈이고 정신이다.
그가 찍은 무와 배추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무차별한 사회적 시장(市場)의 재편(再編)을 묻는 사회적 질문은 물론, 생명은 끊어지고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다시 북돋워지고 움튼다는 웅변을 보여 주고, 우리들 상상력의 진폭이 얼마나 예민하며 직접적일 수 있는가도 되묻고 있다.
그의 사진에는 삶의 파탄과 왜곡에서 빚어지는 황폐감과 즉자적(卽自的) 절망에서도 꿈틀거리고 일어나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 있다.
문순우의 무와 배추에는 몰락을 일으켜 세우는 생의 의지가 있고,
가짜 공동체를 고발하는 메시지가 있으며, 가치 윤리에 대한 물음이 있다.

무와 배추의 사진에는 전쟁도 들어 있다. 척박한 땅에서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는 영상에서 고른 숨을 쉬지 못한 자연을 대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식물을 보면서 생명의 처절한 파행을 본다.
결국 사유(思惟)하게 하는 무와 배추의 영상에서 우리는 근원적 영상까지 간파하려 하는 작가적인 태도를 본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생명을 긍정하고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연의 힘을, 그것에 다가가는 겸손한 마음을 나는 읽는다.
거듭 말하지만 문순우는 애써서 사진 영상의 구도를 택하려 하지 않는다.

1.3킬로그램의 지나 핸디(SINAR HANDY) 카메라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영상에는,
파인더를 보지 않고(언제부턴가 그는 파인더를 떼어 버렸다) 손으로 들고 몸의 감각으로, 몸을 통한 눈으로만 대상으로 다가가는 그의 특이성이 담겨 있다.

사진의 영상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다만 본질을 ‘보게’ 하는 장치이다.
가상이며 표상인 사진은 때때로 본질보다 더 본질적으로 보여 진다.
무의식처럼 작용하는 구도의 개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파인더를 치웠다는 사실은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몸의 태도이다.
이 사진집에서 Rollei SL66E(6cm/6cm) 150m/m의 선택은 대상을 치고 들어가려는 시선의 확장과 시간의 확장, 지속의 확장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는 생명력을 지닌 형태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 빠르고 강하게 피사체에 빛을 응집시킨다. 죽은 자연을 살아 있는 자연으로, 일상적이며 하찮은 것에서 큰 울림을 판각하는 그의 시적 장치는 세상의 내면을 끈질기게 보고자 하는 그의 열정에 기초한다.

이렇듯 문순우는 사진의 방법에서도 자신이 택한 주제와 대상에 긴밀하고 견고한 논리를 연결시키고 있다.
연속적으로 보여 지는 무와 배추의 강렬한 상징적 영상도, 가차 없이 이어지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몸(자연)의 반응에서 비롯되는 카메라 렌즈의 눈(정신과 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출처 - 1999년 5월 서울, 2000년 출간 졸저(拙著) 사회문화비평집 ‘착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문순우 사진집 도록 비평 글로도 전재 

付言 - 이즈음 문순우를 만나본지 오래됐다. 요사이 그의 작업은 어떤 변모를 이끌고 있는지 잘 모른다. 나는 그가 꾸준하고 끈질기게 사진 작업에서 어떤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