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카페 1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4-01-14 23:08     조회 : 10372    

2004.1

파리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거리로 나서면 으레 카페로 발길을 옮기게된다.
파리 시내행차는 카페로부터가 그 시작이다.
도시의 곳곳에 카페는 사람의 발길을 묶어둔다.
공항에서 시내로 오자마자 임시숙소에 짐을 내리고 마침 날씨가 그렇게 맵지 않아 동네 마
실을 나가듯이 가디건을 걸치고 인근 카페로 나갔다.
"안녕! 파리, 잘 있었니? 파리지엔느 너희들도 안녕!"
혼자서 독백을 하고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한다. 웃으면서.
그들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으니까.

난 불어를 못해도 관광객처럼 보여지는 건 싫다.
다가오는 웨이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에 자리잡는다. 그리곤 딱 한마디다.
"카페알롱제!"
"위! 무슈"
웨이터는 웬 중국인 하나가 카페에 들어와서 성큼성큼 창가 가장자리로 들어서는 폼새는 꼭
이 카페의 단골손님인가, 누구지? 하는 얼굴로 다시 나를 힐끔 보곤 한다.
커피에다가 뜨거운 물을 탄 '카페알롱제', 알롱제는 나른하게 퍼진다는 의미란다.
약간 한기가 느껴질 때 뜨거운 커피에다가 생수를 뜨겁게 데운 물을 약간 섞으면 금새 몸이
풀어지는 기미가 온다.
한 모금 두 모금 커피를 입안으로 넘기면서 카페 실내와 창 밖의 정경을 천천히 '알롱제' 식
으로 조금은 나른한 기운으로 말이다.
"음. 그대로군. 1년이 지났지만 여긴 그대로야. 바깥으로 보이는 거리풍경도 그렇고 사람들
모습도 하나도 변한게 없군"

문득, 왜 나에게는 1년 4개월이 지나서 보는 파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만 보일까?
시간이 달라졌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그 사이에 새로 나고 죽은 이들도 수없이 많을텐
데. 난 도대체 뭘 보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걸까?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바로 카페 때문이었다.
저 낡은 의자와 탁자, 수십년간이나 변하지 않는 실내장식들, 두꺼운 커피잔과 각설탕, 신문
을 보고 있는 노인들, 수다를 떨고있는 할머니들, 어슬렁거리고 주인을 따르는 큰 개들, 그
리고 못 알아듣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프랑스어 악센트.

이튿날, 파리에 오면 자주 가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약속이 있었다.
난 조금 일찍 카페로 나갔다.
아뿔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나도 바뀐 게 없지 않은가. 머리가 벗겨진 백인 웨이터도 그대로고, 인도에서 온 그리고
캄보디아 출신의 웨이터도 그대로 일하고 있었으며 카운터에 앉은 뚱뚱한 주인 아저씨도 그
표정 그대로 무거운 엉덩이를 나무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었다.
카운터 선반에 붙힌 오래된 사진들도.
"아! 무슈 김!"
백인 웨이터가 아까부터 나를 힐끔거리고 보더니, 이내 알아본다.
"야, 오랜만이다. 어디에 있었어? 서울에? 도쿄에?"
"후후후"
반가웠다.
"싸바?(좋아)"
"음. 좋아"
영어와 불어를 뒤섞어서 한참을 떠든다, 나도 반가웠다.
"투안 두옹은?"
먼저 묻는다. 이따금 난 이 카페에 투안과 온 적이 있었다.
"내일 볼꺼야"
"같이 와! 참, 그 이쁜 마드모아젤이 의사가 됐다면서?"
"응. 그래. 의사가 됐어. 드디어"
"야, 세월이 빠르다. 그런데 무슈 김, 당신은 그대로구나"
"하하하"

찬찬히 카페를 살폈다, 불현듯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에 변한 게 있었다.
"헤이! 보들레르 아저씨 어디 가셨어?"
"아, 무슈 보드리!"
"그래. 보드리! 보드리 아저씨 말이야"
백인 웨이터는 금새 말을 못하고 쭈삣거린다.
이 카페에 올 때마다 나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이름이 '보드리'라고 해서 내가 시인 '보들레
르'의 이름과 발음이 흡사해서 난 그를 '보들레르'라고 어느 날부터 따로 이름을 붙였다.
쾌할하고 유난히 친절했던 그 노인, 허리가 꾸부정하고, 옛날 한때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
을 그렸다는, 그 노인 말이다.
"돌아가셨어 작년 가을에"
"뭐야?"
쿵! 하는 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울렸다.
"인생이 그런거지, 뭐. 왔다가 가고"
백인 웨이터가 양어깨를 들썩이며 물러선다. 그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