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03. 10. 11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0-09 21:26     조회 : 10263    


2003. MAY. JAPAN. FUKUI. FLOWER. PHOTO


지난 5월 이튿 날, 동아일보
동경특파원 조헌주기자의 안내로 여행을 떠났다.
후꾸이(福井). 동경에서 승용차로 11시간. 한 밤중에 출발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일행은 동경대학교에서 노인복지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 황경성 박사와 오디오 전문가인 일본인 노베사와(延澤)상, 조특파원의 아름다운 부인. 나까지 다섯 사람이었다.



안개를 뚫고 차는 마냥 달렸다.
이윽고 해가 뜨고,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먹는 아침식사였지만 하얀 살밥이 참 달고 맛있었다.

후꾸이에서 우연히 신사(神寺) 지기를 하는 일본인을 만났다.
이름이 마쓰무라 타다노리(松村忠祀). 일흔 살의 노인이었다.
후꾸이 현대미술관 관장을 겸직하고 있었고 화가였다.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술을 한 잔 마시러 갔다.
한 낮인데 나는 그만 취했다.
화가는 그의 보물창고를 열었다.
삼백년도 더 된 나무로 깎은 부처가 있었고 청동부처도 있었다.
그 옛날에 바다건너 조선에서 온 부처였다.
반가웠다.
이런저런 얘기중에 화가는 자신의 선조가 400년 전에 조선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 후꾸이에 정착했단다.
그래서 자신은 조선사람이고 한국사람이며 후꾸이에서는 일본 사람이라고 했다.
재밌는 노인이었다.
그의 집 아틀리에 창호지 문에는 그가 그린 정충(精蟲)을 그린 그림이 있었고 그 창호지 문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성교(性交)와 인간의 모태(母胎)인 정충의 꼼지락에 대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의 우스개 소리가 난삽하거나 난잡하진 않았다.

400년전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정충이 서로 만났고 400년이 흘러 마쓰무라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것이다.
이게 인간이란 포유동물(哺乳動物)의 유구(悠久)함이다.
어쨌든 우린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두 장의 사진으로 그를 찍었다. 만나진 기념으로.


일본인 마쓰무라 조선인 송촌 마쓰무라씨. 그리고 한국인 마쓰무라 송촌씨.
아득한 시간 너머에 꽃씨가 날아서 사시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도 그 아득한 시공간을 타고 동서남북으로 바람처럼 흘렀다.
손(孫)이 손(孫)을 낳고.


노인이 간직하고 있는 부처에는 겁(怯)의 시간이 켜켜히 흐르고 있었다.
부처 눈에도 손자(孫子)가 있었다.
움푹 파들어간 부처 눈엔 마쓰무라 노인의 눈빛도 새겨져 있었고 그 나무 부처가 나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지상 현세에서도 다시 만나고,
내세(來世)에서도 다시 반갑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반가운 노인이었다.


노인의 신사로 향하는 오르막 돌계단에 색정(色精)어린 꽃 한송이가 제풀에 못이겨 떨어져 있었다.
그 꽃이 눈에 차오는 게 마냥 눈 부셨다.


동행했던 황박사의 친형도 또 황박사였다.
이 분은 후꾸이에서 생태농업을 하고 계셨다.
동경대학에서 정치사상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분인데,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딸 모두 아홉을 두셨다.
야구팀을 만들 수 있는 숫자였다.
황박사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밝고 씩씩한 모습들이었다.
복받으신 분이다. 후꾸이 사시는 황박사는.


바다를 보고 온천물에 머리를 감고,
5월인데도 눈덮힌 3천미터나 되는 우뚝 솟은 큰 산도 볼 수 있었다.
나는 5월의 하늘이 청청한 것에 사뭇 놀랐다.
5월의 중심에서 큰 산의 기운이 내 가슴으로 치고 들어섰다.
내겐 축제였다, 지난 5월의 후꾸이 여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