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church city, 자전거로 나다닐 수 있는 도시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7-12-30 09:42     조회 : 7214    

지금 한국에 일부 힘있는 개발주의자들은 국립공원이 가까이 있는 지역이든, 생태적으로 보호되어야만 할 산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산허리를 뚫고 턴넬을 만든다.
세상은 어떻게든 관통할 수 있는 ‘경제적 공간’으로 지배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성장경제’ 허구의 믿음이 일상화된 현실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이 수많은 도덕적 결함과 의혹, 실정법 위반 사실에도 불구하고 새 대통령을 뽑는데 아무 주저 없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다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지 오래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달려들며, 사람들이 도시생활의 다툼 속에서 서로 밀고 밀쳐대는 부산스러움이 일상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격렬하게 거부하는,
푸른색의 풀과 조용히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흐르는 물과 거리의 미술품들, 그리고 새들의 노래로 둘러싸인 도시 공간을 만든다는 주문은 도시 구상, 설계, 구축의 현실 단계에서 오래전부터 당연한 주문으로 세계 현실은 이미 고전의 범례다. 

한국사회의 논쟁의 주의제(主議題)는 이제 경제의 경세제민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아울러-보편적 사회복지의 실현은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사회문제이다-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에, 어떻게 경제 제일주의 경제 획일주의에 삶이 식민화 당하는 처지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또 사이비 효율성 또는 가짜 실용성의 지배에 맞서서 자연, 건강, 자율성이 삶의 핵심 단어로 더 근본의 문제로 대두되어야 할 것이다.
 
욕망의 역사는 이제 자동차의 역사에 결별을 고하려고 하거나 완전히 불가능한 절연에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도시 설계와 도시 구축의 세계적 추세다.

보다 부드러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열망은 자동차와 일정 거리두기를 만들어내고자 계속 시도한다. 이 열망은 이제 도시에 나다닐 때, 자전거로 자유롭게 도시를 왕래할 수 있는 가의 문제로 질문되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도시의 이동에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이동할 수 있는 인류의 발명품으로 최상의 물건 중 하나다.
오늘 날 문명사의 차원에서도 인류 기술의 한 상징으로 자전거는 새롭게 해석되고 의미가 부각됐다.
금속 뼈대를 틀로 체인과 볼 베어링이 알맞게 요소에 배치되어 자전거는 인간을 태운다. 환경을 위협하지 않는 자전거는 인간과 자연에 손상을 입히지 않을뿐더러 자율성을 기본으로 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행위로 이동의 경과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결과를 그대로 나타낸다.
자전거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동차처럼 몸과 두뇌가 안락할 것이라는 ‘가정의 구조물’ 속에 들어앉아 있지 않고, 그냥 밖으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전거 타기는 기계에 우선하는 자연과 육체성(肉體性)을 수반한다.
자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어한다는 의미에서 자전거의 의미는 정치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