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비록 주마간산식이지만 며칠간이나마 내 나라 남쪽과 동해쪽을 둘러봤다. 2000년 이후 만 3년만에 내 사랑하는 나라의 강토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미리 얘기하지만 슬픔이 목밑까지 바짝 차 올랐다.

웬만한 산자락은 비탈을 깎아 아파트를 때려 짓고, 강바닥은 이리저리 물길이 어지럽고, 들녘에는 폐비닐자락이 바람에 쓸리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시멘트 콘크리트와 싸구려 합판이 온 땅을 뒤덮고 있었다.
어딜가나 먹고 마시고 싸는 유흥위주의 '비닐봉지문화'가 합판과 시멘트로 치장되어 세트같은 시설들이 읍과 면과 군과 시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내 나라를 본다는 게 차마...

무엇이, 누가, 우리를, 내 나라를, 이 지경의 반문화 반전통 반역사의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말았는가?

시나 군이나 읍이나 면의 중심에는 지역 나름의 특징이나 정서도 느낄 수 없는 서울의 소비문화와 퇴폐저류 유흥장사가 그 크기만 다르게 줄줄이 열을 지어 있고 전통이나 역사의 흔적 과거 삶의 흔적이라고는 이젠 눈을 씻고 찾아봐야만 하는 아주 희귀한 몰골이니.
우리 후손들은 아니, 지금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아볼 수 있고 읽어낼 수 있을까.

경상북도 풍기 순흥면 소수서원을 갔다.
450년 전의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다. 최초의 사립서원이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왔을 때 이 서원은 빛을 발했다.
이퇴계는 당시 신분과 계급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무쇠장이 배순이란 자를 제자로 삼아 글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찾아간 날 아침은 햇살은 쨍쨍했지만 바람이 차고 매웠다.
옛날 사람들이 글을 읽던 마루에 앉아서 수백년전의 무쇠장이 배순의 글 읽는 목소리를 나는 들었다.
곤궁하여 배가 고플지라도 배움에는 굶주려서 그런지 배순의 목소리에는 짱짱한 기운이 마당 가득 넘쳤다.
450년전 배순의 목소리는 앞 개울을 건너 산자락을 넘어서 멀리 당시 서울인 한양의 임금있는 대궐 처마에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자고. 그래서 나 같은 무쇠장이 쌍놈들도 배움의 기회를 갖고, 인간으로 사는 평등세상을 만들자고.
아, 그러나 지금, 역사는 그만 사지가 짤려 우리는 우리들 존재의 과거 연원도 알수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배순의 쉰목소리는 공허하게 허공에서 울리고 마는 것인가.

수백년전 유럽의 대학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언어로 쉼없이 문학을 깨우쳐 오늘도 바로 그 장소에서 그 후손들이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면, 수백년전 우리의 학교터는 그저 명승지나 관광지로 변해 과거 시간의 세트로만 흔적이 머물고 마는 것인가.
언어가 이어져 내려오지 못함인가. 사용하는 언어와 말하는 언어가 나누어졌기 때문인가. 한문과 한자를 못 읽으니 옛 문헌은 다 불쏘시개나 밑을 딱는 종이로만 후손들에게 보였던가. 아니면 그나마 겨우 인사동 찻집의 도배지로 쓰여지든가 말이다.     

서원 앞에 '경렴정'이란 현판을 매단 정자가 있었다.
옛 사람들이 시를 짓고 읽던 장소란다.
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정자안에 매단 목각판에 글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패이고 상한 희미한 목각판에 글을 읽기 위해서 난 고개를 쳐들었다.
"세상에 뜻을 세워 생활을 일으킨다"는 뜻의 한자 문구가 내 눈에 박혀왔다.
난 내 눈과 마음이 다 아팠다.
아, 옛 선현들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소리를 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