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현실, 그 슬픈 초상(肖像)을 넘어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9-06-07 23:55     조회 : 28111    

미국의 현실, 그 슬픈 초상(肖像)을 넘어 
    - 미국인 화가 모하메드 오마 카하일(Mohammed Omar Khalil)과의 만남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608143418&Section=04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 이상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결국 나의 몫이다."
  노암 촘스키(Profit over People, Avram Noam Chomsky 1928- )

내가 지난 4월말부터 6월말까지 머물고 있는 프랑스 파리 시내 국제 예술가 마을(Cite International Des Arts)에 내 작업실과 이웃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랍계 미국인 화가 모하메드 오마 카하일(73)은 노암 촘스키를 가리켜 “미국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세계를 ‘미친 지배’로 다스리려는 미국의 권력층에 맞서서 그 ‘비계 덩어리’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촘스키의 글이야말로 미국의 양심과 지성이며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라고 했다. 

수단(Sudan) 태생인 카하일은 스물일곱 살 때인 1963년에 이태리로 건너가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이자 형태로 여겨지는 프레스코(Fresco)화와 판화(版畵)를 3년간 공부했고(Academy of Fine Arts, Florence, Italy) 이태리에서 미국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조국인 수단으로 돌아가 수단의 전통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하고, 교직에 있으면서 신혼생활을 하다가 곧 그녀를 따라서 현대미술의 본거지인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단다.

카하일이 마주친 1960년대 후반의 미국의 당시 모습이란 바보같이 ‘천국’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날처럼 소수 초거대 기업이 생산과 유통, 광고 및 운송, 그리고 통신 수단까지 차지하고, 언론과 온갖 미디어 매체를 통해 광고와 선전이라는 수단으로 미국 국민들의 삶, 거의 전체를 지배하는 지금과 같은 미국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고 했다.

1960년대 이미 미국의 민주주의란 미국의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일찍부터 잃고 잃었지만, 미국사회에서 노동자란 고용주가 임대한 단순한 도구는 아니며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적인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까지는 완전히 상실한 그런 사회는 아니었단다. 따라서 베트남전쟁 참전반대 데모나 인종차별 철폐, 시민의 주권 찾기 캠페인 등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당시 미국사회를, 도리어 국가를 혼란에 빠트린다며 여론을 조작하려던 미국의 지배세력들의 감언이설에 대중들이 속기보다는, 대중들은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행동하던 당시 미국이야말로 활력 넘치는 사회로 보였다고 카하일은 말했다.   

그러나 이후 카하일은 자신이 살아온 미국의 지난 40년이란 ‘무너지는 제국’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단다. 토머스 페인 등 미국을 세운 과거의 선조들이 상상했던 형태의 국가로부터 미국은 가도 너무 멀리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911 이후 정치권력은 테러방지와 국가안보라는 미명을 내세워 엄청난 거짓말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태연자약했고 이제 권력은 노골적인 권력의 포로노그래피(pornography of power)화 되고 있다고 했다. 여론은 가공되고 조작되었으며 1983년 미국에 영향력 있는 미디어 기업이 50여개에 달했던 과거에 비해, 이제 겨우 5개에 불과한 미디어 대기업은 마음대로 여론을 왜곡 조종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오늘날 미국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매체를 볼 수 있지만 과거보다 훨씬 적은 수의 미디어 소유자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현실이 됐다. 

“미국인은 이제 미국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도 없을뿐더러 잘 모르게 됐다.”

화가 카하일은 미디어산업이 미국인의 눈과 입과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어막게 되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거대 자본에 흡수된 미디어는 의견의 다양성이나 반대의견은 실종시켜 말살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미국의 기업가들의 숱한 부정행위들과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권력은 이미 대자본에 포섭된 미디어가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할 수없는 구조가 됐다. 대자본과 정치권력은 감시와 견제는커녕 그들이 뉴스를 생산하고 여론을 꾸며내는 횡포를 일삼는데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란다. 

미국 시민인 화가 카하일은 당연히 ‘슬픈 미국’을 그림으로 그려 나가면서 미국의 거대한 주류 흐름과 맞서게 되었다. 

그에게 미술 재료는 뉴욕이란 대도시에 지천으로 널린 찌그러진 깡통이나 천 조각, 찢어진 광고포스터나 우편엽서, 떨어져나간 문짝이나 휘어진 철사, 거리에서 주운 신문과 잡지의 사진이미지들이 세심하게 재료로 선택되었다. 그 재료들을 가지고 카하일은 오리고 붙이고 물감으로 칠해 나가면서 오늘 날의 미국의 얼굴을 그렸다. 가장 미국적인 그림 양식과 체취로 미국의 주류흐름에 반대하는 그림을 그는 계속 그려 나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작업은 현대 미술이 그의 태생의 정신적인 배경인 아랍(Arabe)의 상징주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질 수 있으며 어떻게 이를 변형시켜 아랍과 유럽 사이, 그리고 동시에 미국이라는 그 복잡한 역사적 인과관계와 복잡다단한 사실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현대를 통찰하고 예술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는지를 끈덕지게 실험했다. 곧 그의 작업과 방식은 그가 일생의 반 이상을 보내고 가정을 일군 미국이 배경인 대중문화와 그가 공부한 유럽의 양식들, 그리고 그의 근거이자 뿌리인 수단(Sudanese roots)의 정신을 결합한다.

미국의 욕망에 갇힌 사람들에게 본원적인 시선을 

나는 그가 작업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동판화(銅版畵)에 식각(蝕刻)한 그의 에칭(etching) 작업에 더 시선이 갔다. 그의 동판화 시리즈인 작품 페트라(PETRA)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에 위치한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고대 아랍 유목민인 나바테아인(Nabataean)들이 세운 고대도시이다.

나바테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는 아라비아 북서쪽에 살았던 사람들로, 이미 그곳에서 중국, 인도, 지중해 지역 등과의 교역에 익숙했던 이들은 요르단 남부 페트라에 와서도 교역으로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페트라는 라틴어로 '바위'라는 뜻으로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암벽을 깎아 만든 각종 신전, 무덤,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고대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는 고대유적이다. 해발 950m에 위치한 산악 도시인 페트라는 온통 붉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붉은 산의 높이는 100여 미터에서 가장 높은 것은 300여 미터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부터 서쪽 끝 아드-데이르(Ad-Deir, 장례사원)까지의 거리는 5km에 이른단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상의 왕국이 아닌 천상의 나라가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고 하는데, 이 고대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隊商)들이 들러 간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게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결국 그들은 서기 106년 로마 제국에 침략 당하지만 그 이후로도 페트라와 나바테아인 문명은 한동안 꽃을 피워 갔으나 결국 고대 종교들이 기독교로 대체되어 감에 따라 교역을 바탕으로 했던 찬란한 문명은 몰락하다가 지진으로 파괴된 페트라는 역사 속에 사라졌다. 이후 14세기 이후에는 외부세계에 완전히 절연된 곳이 되었다가 1812년에 와서야 스위스 여행가 부르크하트(Johann Ludwig Burckhardt, 1784-1817)의 재발견에 의해 다시 외부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수수께끼 같은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자, 1989년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Bible)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늘 날 나바테아인들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의 두루말이 파피루스 고문서가 세월과 기후의 풍상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바테아인들의 관개 시설로 사막에 물이 공급됐으며 페트라라는 도시가 형성된 것으로 역사가들이 진술하고 있다. 또한 나바테아인들이 실리에 밝은 슬기로운 사람들로 국가적 배타성을 고집하지 않았고 타문화를 융합하는 지혜를 발휘했음을 그들이 남긴 도시의 유적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해 냈던 것이다. 페트라에 유적들이 로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자기들만의 축조양식으로 모든 스타일을 녹여 하나의 거대한 예술형상으로 드러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긴 세월은 마치 멈춰진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 됐고 1985년 페트라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화와 오늘날의 경제위기, 그리고 지구촌의 앞날에 대해 화가 카하일은 고대도시 페트라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고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통해 역사적 고찰까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화가 카하일은 오늘날 인류가 ‘세계적인 협력’과 ‘세계적인 재앙’의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표현되는 ‘페트라’는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융화와 만남을 표현한 고대도시 페트라의 시원(始原)을 흑백(黑白)의 판화로 단순화시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화가는 지난 세기 각축을 벌였던 전체주의(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 가운데 가장 유럽적이었던 것이 전체주의라고 말했고 그것의 반동으로 미국이란 국가가 세워졌지만, 미국 또한 전체주의적인 흐름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화가는 비서구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통한 세계사적 시각의 확보와 아울러 문화 비교사적인 방법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유럽중심주의나 미국 중심주의는 수많은 역사의 고통과 비극을 파생시켰지만 상상의 역사학으로 그의 그림에서 드러내고 있는 ‘페트라’는 ‘인류의 지리학’을 더 넓힐 것을 그는 그림으로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 문화의 무의식을 읽으려고 했어요. 미국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상을 추구했지만 그 표면적인 이상 바로 밑에는 원주민을 학살했고, 흑인을 노예로 제도화했으며, 물질숭상을 추구한 아주 어두운 측면이 있지요. 나는 그림을 통해 깨지고 망가진 청교도들의 이상을 고발하면서, 그릇된 미국의 욕망에 갇힌 사람들에게 본원적인 시선과 대상으로 고대 인간의 도시 전형인 ‘페트라’를 통해서 마음의 시(詩)를 보여주고 싶었답니다.”

카하일은 뉴욕 파슨즈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New York)과 뉴욕 컬럼비아(Columbia University, New York)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며 그의 에칭작품 ‘페트라’ 시리즈는 미국 국립기관인 아카데미(National Academy)로부터 2003년 최고상(First Prize for Printmaking)을 수상 한 바 있다. 

                                                                          2009. 6 프랑스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