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마음을 보는 눈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0-18 12:28     조회 : 10527    


<p><font size="-1"><strong>윤성원 "시간의 채집" 미술전에 부쳐 - 김상수의 미술비평></font></p>

<윤성원 "시간의 채집" 미술전에 부쳐 - 김상수의 미술비평>

윤성원의 작품 2002년 시간의 채집. 나무뿌리



윤성원, 한 젊은 작가의 등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윤성원과의 만남은 윤성원이 다니는 미술대학원의 학생들이 내 스튜디오로 찾아 와 내가 그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특강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정녕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으며 우리들 나날의 삶에서 의식의, 실재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 그리고 미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 스스로 의문을 갖기를 주문하였다.


그 때 그 특강 이후, 윤성원은 며칠 후 자신이 그린 몇 점의 에스키스와 그림물감이 덧칠해져 있는 스케치, 작은 유화 그림을 들고 나를 다시 찾았다. 난 그 때 그녀가 보여준 그녀의 작업에서 적지 않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음을 지금 고백하려 한다. 그 반가움의 정체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진솔하고 소박한 표현과 지금 우리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를 그녀가 미술의 대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작업은 아주 평범하리만큼 단순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소재와 대상은 지금의 시대에 너무나 절실한 주제의 환기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미술 작업에서 찬찬히 꼼꼼하게 사물을 관찰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와 심성을 읽을 수 있었으며, 이는 나에게도 오랜만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어쩌면 내가 받은 그 때의 그 ‘신선한 자극’이란 소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일상의 주변에서 보다 더 근원적인 대상을 바라보려는 한 젊은 사람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그녀의 미술이 우리들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그리는 대상과 소재는 바로 식물(植物)이었다.

그 중에서도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속에서의 뿌리의 움직임과 뿌리의 형상들, 그리고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변화, 그것의 연속적인 흔들림들, 이처럼 식물이 지니는 시간의 변화와 움직임에 그녀의 시선이 차분하게 응시되고 있었다.

식물은 식물의 본질에서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가지와 잎이 빛을 받아들이는 빛의 흡수성과 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뿌리의 속성인 빛의 역흡수성일 것이다.
잎은 빛을 쫓아다니지만 뿌리는 빛을 쫓아내는 이것 말이다. 그 사이 나무줄기는 이 빛의 흡수성과 빛의 역흡수성 사이에 자리잡아 줄기는 곧장 수직으로 상승하고자 하여 식물이 움직이지 않고 지탱하도록 도와준다.


이런 생태적 속성의 자연인 식물의 운동에 그녀가 관심을 지닐 때는 자연스럽게도 빛과 시간이라는 요소가 하나의 주요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한다. 변화의 본질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삼투로 스미게 마련이다. 식물의 시간, 이것이 그녀의 미술적인 또는 회화적인 주요관심이 되면서 우리들의 시선을 조용히 붙잡아 두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식물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회화적인 눈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의문은 사실 그녀가 생명 또는 생태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과 관심에서 비롯됨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는 역설이지만 그녀의 관심이 차라리 식물이라기보다는 식물을 통한 인간이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문제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생태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인 중요한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들 삶의 근원을 뿌리 채 흔들어 놓기 시작하는 온갖 삶의 부정적 결과들
과 행태들, 이것으로부터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 당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과 발견에서 그녀의 회화적인 출발이 있음을 보게 된다.


생명과 근원에의 모성적인 시선은 차라리 부차적일 수도 있다. 우선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뿌리에서부터 생각해보자. 나무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어 땅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볼 수 없는, 그 뿌리는 나무에 자양과 안정성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어둠과 대지의 요소인 뿌리의 근거는 그녀의 상상력에서 곧 뿌리가 삶과 죽음의 기이한 종합이라는 일단의 해석도 가능하면서, 아울러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채집을 해 나가는 회화적 상상력의 촘촘한 표현으로 드러난 대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스케치들, 조금씩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다른 이미지의 연쇄성과 몽따쥬같은 흑백의 거칠고 꼼꼼한 점묘들. 이는 마치 나무 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는 회화적 표현을 말한다. 사실 뿌리는 땅속에 있으면서도 강력하고도 은밀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땅 밖으로도 나무에 줄기에 잎에 성장을 부추긴다는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듯 싶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무를 볼 때, 땅 밑에 나무의 뿌리에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게 마련이다. 나무의 겉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출렁거림은 때때로 우리의 시선이 머물지만 그 밑에 땅속에 대지 속에 근원적인 근거인 뿌리에 대한 상상은 이렇듯 작가의 상상의 눈에서만 자연스럽게 투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삶과 죽음을 종합하는 뿌리를 응시하면서 역으로 잎새에도 줄기에도 시선을 연결하는 점에서 윤성원의 회화성은 종합을 지향한다고 할 수도 있다. 나무나 잎새, 그리고 줄기의 근거를 보고자 하는 태도에는 주위 사물의 관찰에서 그녀의 성실한 의지를 읽게 하며 이런 그녀의 의지에서 그녀 회화의 단단한 출발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임을 나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의 시간을 통해서 생장과 소멸의 시간을 유추하듯이 그녀의 회화는 이제 보다 더 성숙한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연에서 마음을 보는 그녀의 눈은 아주 소중하다. 이 소중함이야말로 단연 더 깊고 더 넓어야하기 때문이다.
(2002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