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1984년, 오늘 나는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4-08-16 09:19     조회 : 9590    

위  -  한국가톨릭 200주년 기념공연 포스터
아래 - 연극 <사람> 무대 정경 스케치. 1984년 9월 명동성당 야외무대


20년전인 1984년, 나는 그 때 스물여섯 살이었고 한 참 연극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땐 암울한 잿빛의 시대였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고 신문사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국안에도 정보부원들이 거침없이 상주를 할 때였다.
모든 기사는 검열당했고 군사쿠데타를 한 전두환 정권은 조금이라도 자기 권력 유지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모든 모임이나 집회는 강제로 차단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이나 동료 선배들중에서 밤새 어딘가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들 갔다.
핸디폰은 물론 없었다.
어떤 대화는 정보부에서 혹시 모를 도청때문에 전화가 아닌 사람이 직접 조용히 오가며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질곡이었다. 숨이 막혔다.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지금 20대, 30대를 살고있는 젊은이들은.

난 명동성당에서 연극작업을 하고 있었다.
명동성당도 그 당시 전두환 정권에겐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성당 안을 드나들었다.
신도를 가장한 정보부 끄나풀도 있었다.
아니,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체제였다.
무심코 말한마디 뱉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니 시절이 하수상이었다.
택시안에서 무심코 던진 말한마디가 화근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난 한국 가톨릭 200 주년 기념 공연 총연출자로 선정되어 명동성당의 사제관에서 머물 수 있었다. 사제관은 그래도 성역이었다.
명동성당 김수창 주임 신부님이 그 전해인 1983년에 공연했던 <1919. 3.1>이란 제목의 연극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관객으로 보시고 그 연극을 극작, 연출했던 이제 20대 중반의 나이에 지나지 않는 젊은 나를 천주교 200주년 기념공연 총연출자로 발탁해 주셔서 83년 10월부터 명동성당에 제작사무실을 만들고 200주년 기념공연을 1년간 준비하게 하셨다.

당시 난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다.
신부님은 내가 천주교 신자냐 아니냐를 애초부터 질문하시지도 않으셨다.
성경에서 출애급기를 읽어보라고 내게 권하셨고, 서울 북쪽 정릉에 있는 수녀원을 소개하시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수녀분들의 공부모임에 안내를 해 주셨다.
그 해 여름은 무더웠고 수녀원 뜨락에는 매미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 때 난 성경 공부는 뒷전이었다. 미사에 봉헌하는 백포도주를 수녀님들 몰래 홀짝홀짝 맛있게 훔쳐 마시곤 했다. 얼굴 빛이 대낮인데도 빨갰다. 수녀님들은 못본체 하시는 것 같았다.

그 때 난 남아메리카의 몇나라 신부들이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총을 들고 게릴라전에 직접 뛰어드는 남아메리카의 현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제들이 총을 든다?
김수창 신부님은 내게 두 권의 책을 싸인을 해서 주셨다.
신부였다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한스 큉의 책 <왜? 그리스도인 인가?>와 왈벗 빌만의 <선민과 만민>이란 책이었다.

내 머리 꼭대기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경험이었다.
두 권의 책은 나에게 막연하게 알고있던 예수 그리스도가 신(神)이라기 보다는 인간 실존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인 실존 Christ sein 으로 내게 다가 온 것이다.

"그래? 200주년 기념공연 주제나 줄거리는 정했나요?"

공연을 반년 앞두고 어느 날 신부님이 내게 물으셨다.

"녜. 정했습니다. 신부님"

"뭔가요? 우리 가톨릭 200주년, 한국천주교회사 200년인 올해는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지 200년이 되는 해이고 우리 교회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이번 1984년 200주년 기념공연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념비적인 공연이어야 합니다"

난 조심스러웠고 긴장했다, 그리고 주제를 정하고 스토리를 만드는데 많은 고민과 방황을, 갈등을 하고 있었고 이런저런 이유를 스스로 붙여가면서 몸에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매일 들이키고 있었다.
주저주저했지만 불쑥, 내 대답은 단호했다.

"녜. 신부님 저는 주제가 <사람>입니다. 예수나 신이 아니고 <사람>을 그리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국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요"

신부님은 한 참 나를 물끄러미 마주 보셨다.
조바심이 일었다. 신부님은 너무 젊고 경험도 거의 없는 나에게 큰 기대를 하시고, 연극계에 경험많고 유명한 작가와 연출자도 아닌, 이제 겨우 20대 중반의 나를 작가와 연출가로 인정하셔서 중요한 공연을 맡기셨는데, 혹시나 신부님의 의도와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맞습니다. 주제를 잘 정하셨습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천주교회사는 한국 역사 속에 교회사입니다. 주여! 주여! 하고 예수찬양하는 식의 상투적인 공연은 무가치합니다"

난 신부님의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눈길을 슬그머니 피했다.

"김선생님 생각대로 하세요"

신부님께서는 한참 손주뻘이나 아들뻘 되는 30년 이상이나 나이가 차이가 나는 나를 부를 때마다 항상 "김선생님"이라고 경칭을 하시고 부르셨다.
참 그 땐 송구스러웠다. 신부님은 어린 나를 한 사람의 당당한 예술가로 대접해 주고 계셨다.

"그래? 극장은 어디로 정할겁니까? 객석이 많고 큰 무대인 세종문화회관이나 남산 국립극장 대극장은 어때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장소보다는 이 곳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성당을 세트로, 스테인드글라스도 조명을 치고, 대합창단을 세우고, 철제 빔으로 수직 무대를 세워서, 그런 야외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겠습니다"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야외무대를 만들어요?"

독재정권이 과연 공연을 허락을 해 줄까? 하지만 성당 안인데 뭐. 난 성당을 빽(?)으로 배짱이 두둑해 져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모든 공연은 관계 당국에 심사와 허락을 받아야만 했었다. 대본도 사정당국에 일일이 검열을 받아야만 했고.

"좋아요! 해 봅시다"

신부님께서는 믿어주시고 밀어주셨다. 당시 26세의 젊은이를.

드디어 20년전 1984년 9월 15일부터 31일까지 16일간, 가톨릭 200주년 기념대공연 <사람>이 명동성당 야외무대에서 밤마다 공연되었다.
백성희, 손숙, 이진수 등등 국립극단 배우들을 중심으로 출연배우만 기십명 무대에 세웠고, 가톨릭 합창단과 같이 만든 창작 음악을 합창으로 들려주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야외 무대연극이 명동성당을 세트로 공연을 한다' 고 집중 관심을 보였고, 성극(聖劇)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으며 한국연극계의 획기적 공연이었다고 했다.
100여명의 성가대가 합창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빛이 떨어졌다.

중앙정보부 정보요원이 관객석에 숨어서 워키토키로 어딘가에 무전을 열심히 치고 있는 모습을 그 때 난 보았다.

20년전, 꼬박 1년이 걸려서 준비하고 만든 천주교 200주년 기념 공연의 극작과 연출은 내 청춘의 중요한 예술작업이었다. 그리고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이해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그 때 쓴 작품 <사람>은 내 희곡집 <김상수 희곡집>에 당시 출연배우들의 이름과 스탭들의 이름과 같이 실려있다.

얼마전에 김수창 신부님의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몸을 혹사하시고, 여든이 넘어셔서 이젠 몸이 편찮으시단 얘기를.
한국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일방적 선교주의를 타파하시고, 한국 민중속에, 한국인의 마음과 삶의 형식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가톨릭의 진정성을 모색하시고 실천하신 김수창 신부님.
부디 신부님의 쾌차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