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의 무반주 첼로음악을 들으면서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4-09-08 20:22     조회 : 8856    

paper on collage 2004. 9.


Bach의 무반주 첼로곡을 오랫만에 비올라 연주로 듣는다.
사방은 고요하다.
바흐의 곡들은 차분하게 진중(眞重)하게 내 마음을 이끈다.
하루종일 우울했다.
CNN-T.V 뉴스에서 아침에 본,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테러 때문에 폭탄에 죽어 나가는 러시아 어린이들의 영상은.
그리고 그 어린이들 부모들의 울부짖음.
매일같이 일상이 되어버린 터지고 무너지고 죽이고 죽는 뉴스들.
이제 사람들의 신경감각조차도 무감각의 감각인지 이미 오래일텐데.

온갖 이유들로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해악들.
정말 사람들은 사람 본래의 모습과 자연스러운 인간에 대한 연민조차도 다 잊어버려 뒷전으로 점점 밀려나고 마는 것인가.
혼돈과 해체와 분열속에 끊임없이 인간의 삶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내팽개쳐지고 있을뿐인가.
폭력적 수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망상으로부터 인간은 어떻게 빠져 나올 수는 없는 것인가.
새삼 인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요즘은 정작 나도 인간을 어떻게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에 심하게 빠져있다.
거짓말을 해대면서 한 사람을 간단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는 착란에 대해서 어떤식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기괴하고 음울한 미쳐버린 시대에 살고있는 인간들에게는 떠밀려서 살고 떠밀려서 죽는 현실을 이해하기에는, 인간들 스스로 너무 조악스럽고 영악해져 버렸다.
삶이 무너져 내렸음에도 삶을 산다고 너절한 일상에서 물질의 부스러기를 들고 까불거린다.

이 미친 물질의 시대는 실재이상으로 인간을 너무 깊숙히 마구 망가트렸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것이 급격하게 해체된 지금의 시점에서 인간은 각개전투로 삶을 질질 끌고 다닐뿐이다.
삶이나 생(生)이란 언어도 이젠 인간앞에서는 무색한지 오래다.
인간이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고백이나 참회, 기도하는 힘을 재생시킬 수 있는 예술이나 종교 조차도 이젠 차라리 허위의 또 다른 이름처럼도 들린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누구든지 죽는다.
러시아나 이라크의 어린이들, 또 억울하게 다치고 굶어서 죽는 그런 죽음은 제하고도 사람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이 죽음에 숙고하게 하는 게 난 질문으로서의 예술행위일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앞에서 고백이나 참회나 기도하는 힘을 재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인간의 숙명적인 것에 대한 저 근거에 기대어 말이다.

오늘의 문명은 어느 순간에, 찰라(刹那)에, 아무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죽음이 닥쳐지는, 죽음을 직조(織造)한, 현실을 이미 살고 있지만,
그나마 천천히 서서히 죽어가는 수 많은 인간들에겐 다행스럽게도 한번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계기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 계기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의 세계에서 맞서는, 또는 죽음이란 현실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인간의 한계의 시간, 생명이 정지되는 그 시간에 대해서 비로소 예술은 종교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살육과 살인과 전쟁,그리고 위기와 파괴를 가공하는 폭력, 압박, 공갈들,그리고 협박들, 처참하게 죽어가는데도 자신의 생과는 무관하다는 저 신경의 막힘들을 부셔내리는, 
인간의 지각능력을 회복시키고, 보이게 만들고, 보게 만들고, 말하게 만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광의의 정치로서의 예술을 나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무엇인가를 찿아서 나선다는 것, 죽을 때까지, 말이다.

이미 불평은 위엄도 없고 의미도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쩌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법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 경우에는 돈벌이와 허명에 대해서 여하히 자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더 솔직한지도 모른다.
기실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 생을 살기 위해서 더 많은 물질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아침 해를 바라볼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고, 남이 알아주든 말든 내 작품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내 우울은 저절로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