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atist - Marie-Claire Corbel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9-10-23 00:39     조회 : 20388    

Artist - Marie-Claire Corbel
  etching - Metro 정경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1023123638&Section=0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젊은 화가 ‘마리 끌레르 꼬르벨’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프랑스 파리 예술가 마을(Paris International Cite Des Aarts) 본관 건물 입구 회랑에는 밤마다 집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잠을 청한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데 숫자가 점점 늘어간다. 여름 한 철 노숙도 어려운데 곧 닥칠 한 겨울 한파(寒波)는 과연 어떻게 견뎌낼까.

나와 같은 건물 같은 층 아틀리에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프랑스 판화가 마리-클레르 꼬르벨(Marie-Claire Corbel, 30)이 며칠 전에 나에게 말하기를, “언젠가 하루는 노숙자를 아틀리에로 불러들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아틀리에 규칙을 어기면서 그럴 용기는 나는 지니지 못했어요.”라고 했다.

마리-클레르, 그녀에게 있어서 독일 화가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녀가 배우고 느끼고 미술 작업을 하는 근간(根幹)에 바로 콜비츠가 있다.

"아들 페터가 7살일 때, 나는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을 만들었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내 팔에 아들을 안고 거울 속에 있는 내 자신을 그렸다. 작업은 더뎠다. 나는 너무나 피곤했고 마음이 슬펐다. 그러면 아들 페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될 거에요.” 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캐테 콜비츠의 일기 중에서-

콜비츠는 1914년 10월 어느 날, 1차 세계대전 중에 아들 페터가 18살의 나이로 전사한 것을 통지 받는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 전체를 흔들었다. 이후 그녀의 작품은 전쟁의 참혹함과 광기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1919년 당시 여성으로는 최초로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의 회원이자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녀의 작품 세계는 인간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현실을 대상으로 더 깊은 통찰로 작업은 진전돼 나간다.

그녀는 비참한 삶의 처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인간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하고 약탈하는 자들에 대해서 분노했고 인간들 삶의 슬픈 현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그 비참을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그녀의 그림 작업은 가열찼다. 곧 그녀는 자기 자신이 눈앞에서 본 삶의 현장에 대해서 한걸음도 비켜서지 못했던 것이다. 지옥을 사는 현실 속의 인간을 묘파(描破)하는 그녀는 동시에 현실 사회를 변혁시킬 가능성을 인간들에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나치는 그녀를 예술아카데미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하고 그녀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강제 철거시키고 그녀의 전시회까지 금지시킨다. 심지어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퇴폐미술전’이란 제목으로 전시하여 조롱과 비웃음거리로 끌어내렸다.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협박과 신문, 공공연한 가택 수색, 1940년에는 의사인 남편이 사망하고 2년 후인 1942년에는 손자 페터까지 러시아에서 전사한다.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의 절망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말한다. 이 작품은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함부로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석판에 판화로 뚜렷하게 인각(印刻)시킨 것이었다.

이는 콜비츠에게 있어서 미술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차원의 미술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외경(畏敬)을 세상에 외치고 주문한 것이다.

콜비츠, 그녀도 늙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에 대한 신뢰만큼은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절망가운데서도 인간을 계속 그려나갔으니까.

그녀는 마지막 인생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1945년 4월, 77세로 생을 마감한다. 8일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나치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다.

1979년생인 ‘마리 끌레르’는 “콜비츠의 작품을 보면 볼 때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슬픔이 내 온몸을 진동(振動)해요. 내 미술 표현은 아직 너무나 한 참 멀었어요.” 라고 말한다.

‘마리 끌레르’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반도의 남안에 위치한 모르비앙(Morbihan)주(州)의 인구 6만의 한적한 항구도시 로리앙(Lorient)에서 태어나 로리앙 미술학교(L'Ecole Supérieure des Beaux-Arts de Lorient)에서 공부했다. 2000년 스무살이 되어 처음 파리로 왔을 때 파리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프랑스의 문화 와 예술, 역사의 현장인 파리에 와서 30:1의 입학경쟁을 뚫고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L'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Paris)에 다니면서 줄곧 4년 동안 고향에는 없는 지하철을 타는 것이 가장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수많은 다양한 인종, 계층의 사람들, 하루 200만명이 타고 내리는 거미줄 같은 파리 지하철, 메트로(METRO)에서 그녀는 세상을 처음 보았고, 메트로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자신의 미술 작업 대상으로까지 삼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004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운이 좋게도 그녀는 국립중등학교에서 판화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었고 한 달 1500유로의 급여를 받고 매주 스무 시간의 수업을 담당하기 위해서 오늘도 매일같이 지하철을 탄다고 했다.

파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메트로는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죽하면 “일하고 잠자고 메트로를 타는 게 인생”이란 파리 속어(俗語)가 있을 정도이니, 메트로가 파리지엔느들에게 끼치는 일상에서의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리 클레르는 자신의 미술 작업이 그 지하철 메트로의 승객들의 세세한 표정을 읽는 것에서부터 세상을 공부하고 세상을 감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부양을 위해 이른 아침에 일터로 나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이민노동자의 고단한 처지를 볼 수 있었고, 동유럽에서 건너온 악사들이 동냥을 구하는 메트로에서의 어코디언 연주 소리와 노래하는 얼굴 표정에서 망향(望鄕)의 슬픔을, 일가족을 거느리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아프리카계 흑인들과 어린아이들을 꼭 껴안고 메트로로 올라타는 승객들에게서 대를 이어 세상을 살아나가고자 하는 생명인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마리 클레르의 미술 표현에서는 콜비츠의 미술표현에서 보이는 인간의 절규나 보는 이의 가슴이나 정신에 정서적 큰 감동과 큰 충격을 주는 무겁고 결연한 움직임과 강력한 힘의 응결(凝結)을 엿보게 하면서 긴장과 힘으로 육박해 오는 표현의 깊이나 울림은 아직 없다. 차라리 그녀의 판화미술 ‘메트로’는 작고 소박하고 단순하기까지 하다.

이렇듯이 마리 클레르의 동판화(銅版畵) 에칭(etching) 작업은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사람들 삶의 ‘속살이’를 들여다보겠다는 의지가 있고 세상에 대한 관찰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미술은 관념의 유희(遊戱)나 심미적 가치만을 따르는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미술은 그녀가 메트로에서 만나는 일상생활과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잔잔하게 또 역설적으로는 밝게 느끼게끔 비쳐 주기도 한다.

여기서 마리 클레르의 시선이 읽고 있는 메트로에서의 현실이란 오늘 날 도시에 살면서 소외를 느끼는 인간 군상(群像)들의 조각조각 편린(片鱗)의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거의 모든 곳에서 폭력이 벌어지고 차별과 억압이 일상적인 현실에 대하여 인간들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단서로의 에칭작업들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작 무엇이 제대로 필요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이런 질문은 70년 전 캐테 콜비츠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침해로부터 어떻게 인간들이 눈을 뜨고 살아야하며 인간의 정의로운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자꾸 캐묻는 방식이기도 하다.
 
                                                                                              pari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