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월간 중앙 7월호 [김상수 칼럼]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5-09-30 17:56     조회 : 13251    
[문화기획가 김상수 칼럼] 위험한 걸음… 혹 ‘파멸 행진’ 아닐까


월간중앙 권두컬럼

누가 누구에게 지금 “개혁”과 ”혁신“을 주문하는가?

김상수(극작가, 연출가, 미술가, 문화기획가)

1817년, 지금부터 188년전,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지금이라도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란 나라는 그만 시름시름 앓다가 100년 전 1905년에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끝없는 치욕을 경험당하고 만다. 그렇다. 당시 제도도 문제였지만 제도 이전에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이미 깊이 병들어 앓고 있는 결과였다.
지금은 어떤가? 100년 전 역사의 수모를 잊었는가? 불행하게도 지금 여전히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은 깊이 병들어 있다. 이 병들에 있음에, 이 깊은 병환(病患)에 대하여 일정 기간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가의 위기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그 근인과 대안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가?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임기 3년차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는 ‘참여’라는 언표와는 다르게, 지금 보이고 있는 이 정부의 실상은 ‘고립’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제 임기 중반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의 총체적 문제는 우리 사회 세대, 이념 또는 생각, 계층, 지역의 복합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사회통합의 측면에서나 위기관리의 능력에서 이 정부는 계속적인 실패를 거듭했고 심지어는 갈등이나 분열, 위기의 단서를 노무현 정부 스스로가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한다.

국민 여론을 참여시키고 여하히 세론(世論)을 통합시키는 역할에 정치나 정부의 입장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정치나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고립되며 국가의 분열과 혼란과 위기를 초래하는 현실이라면, 이는 정치나 정부라는 존재 자체가 어불성설에 다름이 아니다.

“참여”란 무엇인가? 국민 스스로 동의하는 힘의 결집이 정치적 정책적으로 행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참여”라는 말을 이 정부를 지칭하는 접두어로 스스럼없이 갖다 붙이기에는 참으로 민망하다. 지금까지 이 정부는 국가 관리 원칙이나 국가 경영 원칙에서 말할 수 없이 산만했으며 구체적인 정책의 진행에서도 파행적 비효율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마음에 진정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정치나 정책의 집행에 진(眞)과 실(實)이 없었던 것이다. 정치란 폭 넓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운영하는 것인데도 현 정부는 끼리끼리의 사당적인 행태로 스스로 고립되어 정치나 정책의 활달한 실현이 불가능했다. 일정부분에 한해서만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지난 정권의 정책 관리자나 정책 기술자등을 동원하고 충원했지만, 이는 이 정부가 얘기하는 통합이나 화합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등장시킨 사람들이 그만한 역할을 했는가도 의문이며 헌신과 책임을 보여주기 보다는 공명심을 앞세우는 경우이거나 이 정부의 도덕성을 훼손하는데 일조하는 사람들이 대개의 경우였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와 정책은 불안을 부추겼고 국민의 전반적인 지지가 없는 정치와 정책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고립으로 나가떨어지게 됐다. 장기적 안목과 포괄적이며 실천 가능한 정책 계획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갑작스런 위기 상황이 닥치면 상황적 변수들에 의해서 잦은 변화를 일으키고 스스로 왜곡되는 정치적 리더십은 계속해서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부에 국가 비전과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세세한 설계도가 있는가를 새삼 묻게 된다.
개혁이나 심지어 “혁신”을 얘기하고 있지만 정책안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개혁 실천안이 제대로 있는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공공 정책을 입안하며 집행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국가 운영과 사회 통합을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이 정부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가 일대 의문인 시기도 이미 지나 버렸다. 참여정부는 지난 2년 이상을 뭔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듯한 분위기는 풍겼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으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의 있고 없음까지 질문을 당하면서 요란스런 수선만 떨다가 갈피를 못 잡고 스스로 지치고 있는 형국이다. 계속되는 정치와 정책 결정의 갈지(之)자 걸음과 파행의 형세는 국민들에게 이미 피로감을 넘어서서 어떤 불안으로까지 엄습(掩襲)해 오는 현실이다.

경제 인식에 대한 어리석음과 조바심으로, 국민소득 2만불이란 캠페인을 들고 나왔다. 이미 일본은 1980년대에 달성한 ‘2만불 시대’를 우리도 달성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개발 성장주의 시대의 언표로 박정희 유령을 스스로 들추어냈고, 이웃의 국가로부터 항의를 받고 오해를 산 ‘동북아경제중심국가’등의 시대착오적이며 허망한 패권주의적 성장 표어를 국가 언표로 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까지 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2만불인가에 대한 삶의 근본적인 가치 이해나 가치 인식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행정 도시 건설과 공기업 지방 분산 정책등은 투기경제나 불러일으켰고 삶의 질과 경제 정의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없어 보였다.

이 위기의 근본에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성장경제의 논리'가 있고 사이비 이론가들과 정치적 미숙아들의 정치경제 실험이 국가 근본을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미 무섭게 변했다. 이 성장경제의 논리로는 미래는커녕 닥쳐오는 현실도 살아낼 수 없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경향의 심화, 중국의 세계 공장화와 신패권주의는 세계를 목표로 삼고, 일본은 자국역할을 재조정하면서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데, 한국은 동북아 허브 타령이나 균형자론이라는 허세를 떨면서 성장경제의 근대논리로 나라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 발전에서 성장경제의 방식을 부연 설명하고 암암리에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며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개혁”이란 낱말이 부족해서 이제는 “혁신”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개혁”이란 말조차 낡은 말로 들리는 현실이니 이 현실에 변화를 일으켜야 함을 강조한다는 강박에서 “혁신”이란 말까지 불러온 것 같다. 그렇다면 “혁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진짜 무엇이 “혁신”되어야 하는 건가?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엉터리 학문인 허학(虛學)과 내실없는 행동인 가행(假行)이 판을 치고 설쳐대는 오늘의 현실에서 “혁신”은 또 다른 허언(虛言)이기 십상이다. 작금에 입에 오르내리는 “혁신”은 “혁신”의 대상과 주체가 뒤바뀌어 또 다른 말장난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 최대의 문제는 사회적 담론(談論)은 있지만 그 얘깃거리의 내용과 실체가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말과 행동이, 언어와 몸이, 따로 놀고 있음이 문제이다. 우리 사회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에서 말과 행동의 어긋남이나 불일치는 큰 사회적 불행이다.

지금 누가 “개혁”이나 “혁신”을 얘기하고 있는가? 바로 위정자들과 사이비 지식인들, 그들이다. 그들은 그들 삶의 방편으로 “개혁”과 “혁신”을 얘기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개혁”과 “혁신”을 얘기하는 대상에서 자신들은 제외하기 십상이며 그들이 상대하는 대상이란 애꿎은 국민들이다. 오만하고 방자하다. 누가 누구에게 “개혁”과 “혁신”을 주문하는가? 빠듯하고 팍팍한 노동과 일상으로 하루하루 삶을 겨우 이어 나가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들은 건방을 떨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불편과 불만이 아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개혁”, 또는 “혁신”의 시작과 출발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그 대상이 아니다.
“개혁”, 또는 “혁신”은, 힘을 가진 자들과 힘의 술수를 믿는 자들이 통절하게 참회하게 할 수 있는 힘과 정의, 힘과 도덕의 상관성을 깨우치는 사회적 제도로의 실천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개혁”, 또는 “혁신”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든, 힘 있고 가진 자들이건, 진실한 마음(實心)으로 실질적인 일(實業)을 행하게 하는,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사회적 토대를 계속해서 마련하는 사회적 노력인 것이다.
곧 개혁이나 혁신은, 실심(實心), 실업(實業),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사회적 약속의 근거다.
벌써 200년도 더 이전에 조선의 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은 그의 서책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곡물의 성장에서 열매가 맺기까지 진(眞)과 실(實)의 과정이 실사구시(實事求是)라 하였다. 그렇다, 정치란 실사구시의 눈으로 행해야 한다.

실사구시는 현실의 효과와 능률, 경제성의 태도만을 따지는 입장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실사구시에 대한 오해는 실사구시를 ‘기능적 합리성’ 이란 근대성의 측면으로만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사구시는 식물의 생장에서 보듯이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자연성에, 제대로 어울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 삼는 태도이다. 실사구시에서 인간은 지행병진(之行竝眞), 언행일치(言行一致) 하라고 선인들이 일렀다. 벌써 옛날에 우리들의 선인들은 무서운 주문을 우리들에게 했다.

따라서 “혁신”은, 사람이 더불어 더 나은 삶을 살만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며 갈등과 분열의 현실을 줄이거나 끊어내고 우리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최적화(最適化)시키는 능력의 문제이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후손들에게도 삶의 가치를 전수시킬 수 있고 새로운 시대 인류의 삶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만들어 내는 우리들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개혁”이나 “혁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들 삶의 방식을 꼼꼼하게 문제 삼으면서 우리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에 진지한 물음을 가져야만 할 때다.

이제 전체 국민을 단순한 임금 노동자나 물건 생산자, 물건 소비자로만 취급하는 지금과 같은 경제 정책 방식은 한시바삐 전면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경제를 ‘규모’로만 이해하는 착시적(錯視的 )시각에서도 벗어나야만 한다.

올해는 광복 60년이다. 무엇이 국가의 올바른 정책이고 국가 정체성인가를 집중해서 되물어야 할 때다. 100년 전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치욕의 원인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2005년, 지금의 한국이 처한 제반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들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하는 실천적인 비전으로 국가 정치와 국가 정책은 마련되어야 한다. “개혁”이나 “혁신”을 얘기하겠다면, 개혁이나 혁신의 내실이 무엇이며, 현실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누구를 위한, 무엇을 향한 개혁인가를 따져 물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