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禮)를 모르는데, 어떻게 법(法)을 알겠는가?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0-03-12 10:00     조회 : 7191    
예(禮)를 모르는데, 어떻게 법(法)을 알겠는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이건희 일가의 ‘예법’이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다보면 이건희 일가의 예법이란 애초부터 무너져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책 226폐이지를 읽어보면 ‘이건희의 생일잔치’가 나온다.


“2003년 1월 9일 저녁 6시 호텔신라 다이너스티홀, 이건희의 회갑잔치가 시작됐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이날 잔치의 사회를 맡았다. 지휘자 금난새, 유명국악인, 성악가, 가수 등이 대거 출연한 자리였다. 메인 테이블에는 이건희 아들과 딸, 사위, 며느리, 손자 등 직계가족이 앉았고, 주변 테이블에는 이날 오전에 1억 원씩 상금을 받은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자 부부들이 앉았다.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 축하연은 이건희의 생일에 맞춰 열린다. 노벨상을 흉내 내 만든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심사위원장은 이현재 전(前) 총리였고, 각계 요직을 거친 사람들이 심사위원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이건희의 생일잔치는 공식행사를 빙자하여 공식비용으로 치러진다. 손님들에게는 식전와인, 식간와인, 식후와인으로 상당한 수준의 것이 제공되고, 애피타이저로는 푸아그라(거위 간), 메인 요리로는 와큐(일본에서 키운 소) 등심에 트뤼프 버섯으로 만든 소스가 나온다. 이건희 가족들 테이블에는 프랑스에서 항공기로 공수된 냉장 푸아그라가 제공됐다.

내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잔치에서는 손님에게 더 좋은 음식을 주는 게 정상 아닌가. 생일잔치에 손님을 불러놓고 손님에게는 냉동 푸아그라를 주고, 자신들은 냉장 푸아그라를 먹는 게 영 불편했다.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이건희 가족의 테이블에는 천만 원짜리 페트뤼스 와인이 있었지만, 손님 테이블에는 이보다 훨씬 싼 다른 와인이 있었다”


예란 예의(禮意)다. 예의란 예로써 상대에게 드러내어 존경하는 뜻과 태도이다. 누굴 존경하는가? 상대다.
이런 예를 모르는데 뭔 법(法)을 알겠는가?
법이란 도리(道理)다. 사람으로 지켜야 할 길이고 예로 지켜야 할 규범이다.
이는 존재하는 관계의 기초다. 존재의 근본이고 양식(良識)이니 곧 양심적인 판단력이다.
그런데 이건희는 이 판단력 자체가 작동되지 않는데 어떻게 예를 알고 법까지 알 수 있겠는가?

명예, 교양, 돈의 문제

삼성이 닮고 싶어 하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존경받는 현실과 삼성 이건희 일가가 한국사회에서 역할과 책임을 회피하며 비난받는 현실이란 천양지차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명예와 교양은 돈으로 사들인 것이 아니다. 사회적 역할로서 정직한 헌신이었다. 그래서 교양이 명예를 쌓았다.

중국에 이인(里仁)에서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라고 했다. 부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원하는 것이지만 정직한 방법으로 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리지 않음이 옳다, 이렇게 의역해 본다.

천민과 잡민과 백정(白丁)

내가 생각할 때 우리사회 많은 지식인들의 언어 오남용 중에서 가장 빈번한 언어 오남용이 가축을 잡는 ‘백정’을 가리켜 ‘천민’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언어사례가 있다.
백정은 설사 신분이 낮다고 해도 인간의 인격자체를 함부로 깔보는 차원의 의미로 ‘천민’이나 뿌리 뽑힌 ‘잡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백정이 가축을 잡는 것은 업(業)이지만 인간으로의 자존심을 까닭 없이 훼손당할 이유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천민’이 아니고 ‘잡민’은 더욱 아니지 않겠는가. 도리어 백정이 하는 일의 역할에 비추어 보자면 소를 잡는 다는 건 기술이 아니라 도(道)라고 했다.

도는 마음의 길이다.

모두 잘 아는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 중에서 포정해우(庖丁解牛)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소를 잡는데 칼질하는 포즈가 음률과 장단이 아주 잘 맞았다. 이를 본 왕이 크게 감탄하여 어떻게 하면 소를 잡는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백정이 칼을 내려놓고 답했다. "소인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소인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의 이치에 의지하여 소의 틈새에 칼을 찌르고 소 몸 안의 결을 따라 칼날이 약동합니다. 소 몸의 생김을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백정이 외간 사람과 만나 절을 할 때 피 묻은 흰 옷을 입고 맞절을 하지는 않았다. 작업복은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벗고, 새 흰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맞절을 나누었다.

이렇듯이 소 잡는 백정이 도와 예를 갖추었는데. 세계적인 대기업을 이끈다는 일가가 갖추어야 하는 예와 도는 과연 어느 지경에 이르고 어느 세월에야 비로소 몫을 나름으로 할 수 있나.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본격적으로 불매운동 얘기까지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이건희의 합당한 소이(所以)는 무엇으로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