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수첩 1995년. 프랑스 파리 미술전시를 끝내고 유럽여행중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0-20 10:19     조회 : 10140    


1995. MARCH. NETHERLANDS, AMSTERDAM. PHOTO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행 익스프레스 기차는 이름 그대로 아주 빠르게 달렸다.
독일 퀼른의 중앙역에서부터 따라오던 짙은 안개는 조금씩 잘게 수평으로 퍼지면서 드문드문 비치는 햇살 속에 서서히 잠겨들고 있었다.
94년 12월 하순 김포공항을 떠나서 해가 바뀌어 95년 3월 초순. 석 달하고 나흘째의 여정.
파리에서 미술전시 준비와 전시로 삼 개월을 보내고. 독일 본에서 이틀, 이제 암스테르담에서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다.

무턱대고 떠난 여행이었다. 한 겨울에.
오라는 사람 하나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 낯선 시간으로.

항상 변두리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 변방(邊方)에서 억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년부터 자꾸 나라 밖으로 나갔다. 이백만 원 벌면 이백만 원어치 나가 다니고. 나는 어느 날부턴가 여기 이곳 한국에서 연극을 하고 영화를 한다는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의 정치 현실만큼이나 한국의 현대문화 예술은 제 자리에 설수가 없다고 느꼈고. 스스로도 외면받고. 그 외면을 차라리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내 미친 부정(否定)의 힘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이 변방의 공간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꽃과 나무와 산과 들이 그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朝鮮)의 문화마저 없었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버팅겨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여기 예술이 있는가? 그것도 현대예술이 있는가? 그림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말이다. 없다.
만들 재주도 없고 또 볼 재주도 없다. 인정할 재주는 더구나 없다.
뭐 좀 한다는 놈이 나오면 죽일려고 없애려고 기회를 박탈하고 폄하시킨다.
말 잘하고 비굴하고 웃음을 띠고 다니면서 굽실거리고 인맥 학맥이 판을 친다.
나처럼 고등학교 다니다 만 놈은, 성깔도 좀 나쁘다고 돼 있는 놈은 빨리 이 계통의 예술작업을 포기하고 혼자 글이나 쓰든지.
조용히 혼자할 수 있는 거나 처박혀서 하는 거다.
모방과 도용(盜用), 흉내내기, 그럴 듯 해 보이는 문화의 옷을 입은 위선(僞善)과 조악한 표현들. 구역질이 다 났다.

장엄한 빛과 소리와 저 존재의 뿌리를 강타하는 살아 있는 예술이 과연 있는가.
어린 애들은 포로노를 연극이라는 간판을 달고 기를 쓰고 하겠다고 낑낑대고.
나이 처먹은 놈들은 지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뭔지도 모르고 해되고 있으니.
어린 애들이 형편없는 연극을 한다고 모가지에 힘을 넣고 윽박지르는 놈들은 도대체 그 아이들한테
뭔가 제대로의 연극작업이 무엇인지나 가르쳐주거나 보여준 적이 있는가. 없다.
변두리 나라치고 웬 남의 나라 연극을 그렇게 많이 무대에 올리고 있는가.
번역이라도 제대로 됐는가. 웬 연극 교수는 그리 많고. 선생은 많은지. 무슨 평론가는 또 이리도 많은지.
창작이 없는데. 정작 작품이 없는데 말이다.
평생을 연극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놈들이 대학교수고 예술가고 원로고 어른이니. 도독질이나 하고.
남의 나라 연극을 허락도 안 받고, 그냥 가지고 와서 맨날 자기 대표작이라고 해대고.
문예진흥 창작지원금은 돌아가면서 독식을 하고. 세금으로 내라는 문예진흥기금은 안 내고.
탈세를 하는 놈들이 그 진흥기금은 몇억씩 타다 먹고. 문화걸뱅이 짓이나 하는 놈들이 선생이라니.
각설하고. 나는 93년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에서 짜장면이라는 연극을 쓰고 연출하고는 당분간은 연극을 안 하기로 했다(註주 2001년에 2월, 만 8년에 국립극장에서 연극 <섬>을 재공연하게 된다)

이십대와 삼십대 중반까지 아홉 번의 창작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열 편의 희곡을 책으로 묶고.(주註 1995년 당시)
갑자기 나는 너무 힘들고. 빚도 지고. 누가 하라고 등을 떠다미는 것도 아니고 좋아서 하는 연극이라지만.
너무 젊음이 혹독하게 소모되고 낭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떠났다.
기회가 생기면 떠났고, 또 쏘다녔다.
줄기차게 밖으로 한 4년을, 해마다 거의 반년씩을 밖으로 다녔다. 나라밖에서 예술할 수 없는가를 물었다.
또 세상을 보라 다녔다. 간신히 연명하는 여행이었다.
오지(奧地)를 가 봤다. 길도 모르고.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95년 3월 초순, 파리에서 미술전시회를 끝내고 몸이 지쳤다. 태어나 처음하는 미술전시회였다.
몸이 피곤해서 움직이는 게 힘이 들었다. 가난한 여행은 지치기 마련이다.
독일 본에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 김창희를 찾았다. 이틀을 그 친구의 집에서 몸을 달랬다.
그 친구의 안내로 쾰른의 현대 미술관을 보고 쾰른 대성당을 장식한 무수한 조각들을 찬찬히 보고 나서 건너편 식당에서 소시지와 맥주를 먹고 쾰른 중앙역에서 암스테르담 기차를 탄 것이다.
헤어질 때 창희가 미국 돈으로 삼백 불을 줬다. 외국에서 고생여행을 하는 거지 친구가 찾아오니까 환대를 해주고 돈도 주고.
기차가 떠나고 창희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때,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났다.

안개가 걷히면서 햇살이 기차창으로 달려들었지만 기차에서 또 술을 마셨다.
이제 내일 모레면 한국으로, 고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몸도 지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으니.
또 술 밖에 더 먹겠는가.

기차는 달렸다. 앞좌석에 중년의 동양 여자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제목이 유럽의 미술관이라는 일본어 안내서였다. 일본 여자였다. 일본책을 보고 있으니.
하여간 어디를 가나 일본 사람들이 나다니고 차고 넘쳤다.
어쩌다가 얘기를 나누게 됐다. 마흔 다섯이라고 했다. 대학 다니는 딸이 둘이 있고 남편은 미츠비시라는 큰 회사의 부장이라고 했다.
대학 다닐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술대학으로 전학을 했는데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은 접었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으로 간다고 했다. 빈센트 반 고호를 보러간다고.
그곳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호의 미술관을 보러가는 길이란다.
언젠가 자기는 일본에서 반 고호의 해바라기 그림을 봤는데 그 해바라기는 바다를 건너 수만 리를 벗어났지만 하나도 시들지 않았다고 했다.
고호는 화구를 살 돈이 없는 가난속에서 목숨을 바쳐 그림을 그렸는데. 일본 사람은 그 해바라기를 수백 억에 사다가 걸어놓고 있다고 했다.

고호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고. 무엇보다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그 가난과 싸움박질을 하고 그만 지쳐서 죽었는데.

이제 고호의 해바라기는 고호의 해바라기가 아니다. 그건 이미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와 허영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장식품일 뿐이다.
고호의 뜻과는 아무 상관 없이.

91년에, 그리고 93년에 나는 고호의 많은 그림을 암스테르담 그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무서운 힘으로 잡아 끈다.
그 소름끼치는 빛의 파열은 그가 그의 그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고 그의 이성은 그것 때문에 망가졌다는 고호의 일기 그대로였다.
아를르의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서 그는 하늘에서 거의 수직으로 내리쪼이는 저 무서운 햇빛과 싸움을 건 것이다. 그것도 정면으로.
눈이 점점 침침해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올수록, 고호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색칠을 했을 것이다. 1853년에 태어나 1890년에 죽었다.
딱 서른 일곱의 삶.
1995년에, 나는 고호처럼 고호같이, 서른 일곱의 나이를 먹고 있었지만 고호와는 다르게 죽지도 않고 멀쩡하게 살아서, 다른 나라에서 기차를 타고 있었다.

일본 여자가, 중년의 여자가 내 나이를 물었다. 우린 벌써 서로 술잔을 주고 받았으니까.
고호가 죽었을 때와 동갑이라고 대답했다.
어디서 오냐고? 어딜 봤냐고? 물어왔다.
차칸에 놓아 둔 긴 포스터통이 뭐냐고 물었다. 그림을 그리려던 여자는 아마 내가 가지고 있던 포스터통을 보고서
내가 그림이라도 그리는 사람으로 여겼는가 보다. 고호를 주절거리고 있었으니.
난 파리에서 미술 전시회를 했다고 했다. 여기 이 통은 그 포스터고.
여자의 눈이 똥그래졌다. 파리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전시회를?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여자는 대단하다고 세 번씩이나 힘주어 말했다. 그래 일본사람들에게 파리는 대단한 곳이지.
보여 줄 수 있냐고 했고, 나는 아예 한 장을 기념으로 사인까지 해서 주었다.

어디를 간다고 했었죠?
고호의 미술관이요.
아하 거기요.
가 봤어요?
네.
어딜가는데요?
서울요.
암스테르담에서는 머물지 않을 예정인가요?
하루나 이틀이요. 라이덴 대학이라는 데서 연극 강의가 잠깐 있어요.
강의요? 연극이요?
쑥스러웠다. 강의는 무슨, 대단치도 않다. 어떤 인연으로 그 곳 동아시아과에서 특강이라고 한 두어시간 떠들게 되어 있었다.
고호 미술관을 찾기가 쉬운가요?
네. 쉬워요. 전차를 타면 돼요. 그 앞에 네덜란드 국립미술관도 있는데 그곳을 가면 렘브란트도 볼 수 있어요.
아, 렘브란트.
중년의 여자가 눈을 반짝거렸다.
여기 당신이 보는 그 책에 나와 있을 거에요.
아 그렇군요. 전차를 타기가 쉬운가요?
그건 책에 없나요? 여행 안내서에요.
잠깐만요. 있어요.
그럼 됐네요. 고호 미술관 앞에까지는 제가 같이 갈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네.

우리는 그 미술관 앞에까지 같이 전차를 타고 갔다.
그녀는 표를 사서 들어가고. 나는 다른 기차를 타기 위해서 암스테르담 역까지 되돌아와야 했다.

아줌마가 혼자서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저 일본 여자를 혼자서 나다니게 하는가.
여행은 그 여자의 마음에 어떤 희열을 갖게 하는가. 딸이 둘인 중년의 여자.

그때 만난 그 여자는 지금 일본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자기 말처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199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