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la, Manila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5-12-30 09:46     조회 : 8840    

네 시간을 날아 한 여름인 나라 필리핀을 처음 왔다. 내게 동남아시아는 초행이다.
이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나라, 공기좋고 물빛 푸른 초록의 야자수 나무 밑에, 흰 백사장에서 두둥실 뭉개구름을 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겠다는 예정은 저편 한쪽으로 그냥 저절로 치워졌다. 그 흔한 리조트는 내 생리에 애초부터 맞지 않는 것이었나.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필리핀은 아름다웠다. 짙은 녹색의 향연이 쉴새없이 펼쳐지고 드문드문 인간의 노동이 아닌 불도저로 밀어부친 시뻘건 상채기만 아니라면 여기가 바로 인간들의 낙원이 아닌가. 

공항을 나서면서 이 나라의 가난이란 짐승과 바로 마주쳤다.
정치 경제적 불안정, 엄청난 빈부격차. 자연의 저 풍요와 인간들 이 비참의 가난이란.
다녀 온 이들의 얘기로는 인도가 그러하다던데. 난 아직 인도를 가 본적이 없다.
그냥 여기 필리핀 정도에서 이미 상상할 수 있겠다. 

마닐라를 쏘 다녔다. 차마 내 카메라로 어떤 정경도 바로 들이대기가 쑥스러웠다.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자의 일당이 우리 돈으로 2천원에서 많아야 6천원이다. 피자 한판을 시켜 먹으면 우리 돈으로 7천원이 나온다. 경제 셈법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절대 사치와 절대 빈곤이 삶을 일찍 체념케 한 것인가.
쓰레기 장을 뒤적이는 일가족들의 모습에서 차라리 장마철이 아닌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질척거리는 쓰레기장을 쑤시고 다니자면 축축한 몸뚱아리는 접어두고 사람의 넋은 과연 어떻게 건사하겠는가. 

골프장을 찾아 이 곳까지 날아 온 보통 한국사람들이 걷는 팔자 걸음과 골프채를 맨 그들의 다부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는건가. 마닐라 근교 평야를 뭉개고 한국인 아저씨 아줌마들의 단체 '나이스 샷'은 딱 30년에서 40년전의 자기들 비참과는 동 떨어져 아랑곳 없다. 골프장 벽면에는 한식 메뉴판이 한글로 걸려있고 '육계장'과 '곰탕'이 삐뚠 글씨로 붙었고 착한 필리핀인들의 동작과 표정은 이 나라의 날씨만큼 나른하다.

마닐라 거리를 닷새 나다녔다.
하나같이 사람들은 착했다. 그리고 어떤 경계도 없이 웃었다. 저 웃음들에 비참도 가려지는 것인가.
우리나라 달 동네 봉천동 산자락이 생각났고 아직도 드러내고있는 '대-한민국' 허장성세의 뒤편에 가려진 빈곤의 자락들이 떠올랐지만 이들 필리피노들한테서는 어떤 살벌한 전쟁의 기미도 전혀 없다.
'지프니'를 타니 설날 푹죽을 선물로 건네는 청년과 그 푹죽에 손을 다칠까봐 몇번인가 주의를 당부하는 노파의 부드러운 영어 발음. 
지상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마닐라 시민들의 깨끗하게 세탁된 흰 옷들.
마닐라 도시를 가로 질러 흐르는 큰 강가에 줄지어 선 '하꼬방'에서 난 차라리 생존의 찬연한 한 모습들을 읽을 수밖에. 전기메터기가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있는 짜들어진 이 가난의 정경 한 가운데서 인정에 찬 한 끼니 간이식사를 했다. 환하게들 웃었다. 나도 그들도. 우리 돈 1백 20원 식사는 따뜻하게 댑혀져 있었다. 누군가가 내 등 뒤에서 영어로 소리쳤다. "카메라를 조심하라" 고. 난 그냥 바보같이 웃고 서 있었다. 나도 이미 필리피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