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눈으로서의 연극 - 한겨레신문 김상수 문화칼럼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1-05-20 21:33     조회 : 23904    

photp - 2011 TAXI,TAXI

정신과 눈으로서의 연극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8966.html

2001년 국립극장에서 연극 <섬.isle>을 작·연출하고 오사카, 도쿄, 베를린, 파리 등지에서 예술작업을 하던 나는 2010년 8월 창작연극 <화사첩>(花蛇帖)을 무대에 올리면서 만 9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연극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이어서 <택시, 택시>(TAXI, TAXI) 1차 공연을 지난 5월1일 서울 대학로에서 막 끝냈다.

서울에서 연극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대학로 연극이 상업주의에 함몰되어 비판정신도 예술성도 실종된 참담함을 목격했다.
그저 저급한 오락물로 공연 현실은 추락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악한 무대나 엉터리 번역연극이 활개를 쳤다. 이는 오늘만의 현실도 아니지만, 서울에서 마지막 연극을 했던 10년 전보다 공연 환경과 공연 현실은 더 망가져 보였다.

문제는 어떤 구조나 문법도 없는 말장난과, 무차별로 해외에서 빌려온 텍스트들로 끊임없이 관객들을 웃기려고 안달한다는 것에 있다.

한국의 연극 역사 자체가 왜곡되어 길고 긴 시간 동안 엉터리 번역연극에 의존해온 현실이니,
그런 타성이 이제 무비판적으로 익숙하기까지 한 현실이 됐다. 이는 문화적으로 깊은 식민지 현실이다.

오랫동안 우리 연극은 연극의 위치를 바르게 설정하지 못했고,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연극은 무엇보다 현실의 모습을 파악해 우리 사회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그 역할이 있다. 생명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이고 또 어떤 사회여야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에 한국 연극이 긴 시간 게을리하면서 그나마 한 줌 남았던 관객들도 극장을 떠났다.

연극을 하는 태도는, 연극을 통해서 삶을 꿈꾸며 생을 탐구하고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가를 현장의 시간·공간에서 ‘액팅’하는 것이다. 갖가지 개성이 충돌하고 의견과 말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연극의 언어는 씨실과 날실이 만나는 것처럼 인생의 여러 의미들을 직조하고 구축해서 인간과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올해 들어 다급해졌다.
현재 대학로가 처한 공연의 무정체성, 저급한 소비오락물과 싸구려 돈벌이로 전락해버린 획일적인 공연상업성에 대응하여 연극 본래의 예술적 기능을 일깨우고 확인시키는 역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싼 극장대관료는 충격적이었다.
대학로 길목 좋은 데 자리잡은 음식점이나 커피숍 같은 일반 영업집보다도 문화시설이란 극장의 대관료가 훨씬 더 비싸다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극 관객은 없고 연극은 돈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극장 대관료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비싸다.
정부의 지원방식도 문제가 많아 보였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건물주나 극장주는 비싼 대관료를 챙기는 구조다.

연극 <택시, 택시>가 처음 공연되었던 1988~89년 당시와 2011년 오늘 한국 사회의 실상은 그 본질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차라리 20년 전으로 후퇴했다.
어렵게 가꿔온 민주주의가 지금 일대 위기이고 총체적으로는 사회위기인 현실이고 곧 삶 자체가 위기다.
병든 자본중심주의의 지배로 모든 가치가 돈 위주로 흘러가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을 연극으로 말한다는 건 너무나 눈물겨운 일이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연극을 보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연극 만들기를 계속하는가? 연극의 본질인, 인간이 세상을 알려고 하는 저 무한한 욕구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 감추어진 것, 외면한 것’을 찾아내고, 좀더 생생한 삶을 보고자, 알고자 꿈꾸기 때문이다.
연극은 당대의 사회와 인간을 그리며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연극의 현실을 바로잡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한국 연극사에서 식민지 연극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문제만큼이나 풀기가 어렵다.
어떻게 한국 연극, 그것도 한국인의 한국어로 된, 고전으로서의 창작연극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나에게도 거듭해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