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문명에 대한 묵시록(黙示錄)으로의 미술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1-08-29 03:43     조회 : 5242    

임옥상 그림 - 광화문 光化門 (oil on canvas 456cm*182cm)
                - 후지산 富土山’(oil on canvas 456cm*182cm)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829135340§ion=04

인간과 문명에 대한 묵시록(黙示錄)으로의 미술
임옥상 미술전을 보고



3년 만에 다시, 화가 임옥상의 미술과 대면했다.
 
지난 4월 초순에 내가 쓰고 연출한 연극 TAXI,TAXI를 화가가 보러 왔을 때는 지인들과 같이 한잔 술을 나누면서 짧게 인사만 나눴다. 지난 목요일 3년 만에 다시 대면한 그와 그의 미술, 특히 대형그림 ‘광화문’(oil on canvas 456cm*182cm)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한참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는 화가의 새로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오는 9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8년 만에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임옥상의 토탈아트-물, 불, 철, 살, 흙’에서 만난 그의 회화는 오늘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파국적이고 묵시록적(黙示錄的)인 계시(啓示)를 보여주고 있다.

충격을 주는 그림을 만날 때, 그 그림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한 화가 자신의 자기시각과 자기진술이 정직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면서 날카롭고 팽팽한 자기육화(自己肉化)가 그림에서 고스란히 전달되어 올 때다.

기실 3년 전인 2008년 10월, 나는 여기 프레시안에 칼럼으로 ’민중 미술가 임옥상에게 묻는다‘를 쓴바 있다. 나는 그 글에서 쇠 조각을 이어 부처(佛像)를 만들고 있는 화가를 보고, “부처는 '불타(佛陀)'가 부처가 됐고 '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이다. 부처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함께의 구원‘이라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임옥상의 작품 부처가 자리하기를 나는 기대해 본다. 그래서 민중의 화가로 그가 진(眞)하고 실(實)하게 피어나기를 나는 고대한다.”고 썼다. 

 ‘마침내’, 이번 전시에서 그의 대형그림 ‘광화문(光化門)’, ‘자금성(紫禁城)’, ‘후지산(富士山)’에서 드러난 화가의 주제의식을 보면서 나는, 인간과 세상과 문명에 대한 화가의 치열한 대면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의 분투(奮鬪)를 볼 수 있었고, 그의 묵시론적인apocalypse 세상의 직관은, 지금 오늘 현재를now 크게 걱정하고 직시하는 ‘살아있는 정신으로의 화가의 눈’으로 그의 그림은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둠의 심장에 부어진 핏빛으로의 ‘광화문’

이명박 집단의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광화문은 이내 ‘빛’을 잃었다. 시멘트로 처발라 대리석으로 마감한 광화문 돌바닥엔 전투경찰의 군화소리만 기승을 부린다. 그래서 광장은 이명박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죽었다. 따지고 보면 잘 살게 해준다는 거짓약속에 영혼이 덜컥 정지된 사람들의 크게 어리석음과 도대체 누구를 찍어야 할지 판단이 어려웠던 지난 대선에서 무수한 투표기권자가 나오면서, 이명박이란 기이한 인물이 등장했고 헌법을 마구 침탈하는 범법(犯法)행위가 마치 ‘통치’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상사에서 이명박 집단이 말하는 ‘발전’은 차라리 실패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이 더 무서운 지경인 현실임을 4대강 등 곳곳에서 목격하게 됐다.

 광화문 세종로만 보아도, 갑자기 대왕세종을 모욕하는 황금색 덩어리체 동상이 들어서고, 수령 100년 가까운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광화문광장은 물론이고 인근 도로와 인도를 물샐틈없이 죄다 포장해놓고 화강암 보도블록 밑에까지 시멘트로 마감해 물 한 방울 흘러들 여지조차 없앴다. 고증을 해서 새로 만든다고 만든 광화문 앞 흙길도 흙색 시멘트로 포장해서 빗물은 남김없이 하수도에 쓸려가기를 바랬다. 광화문이 툭하면 홍수난리가 거듭나고, 인근 건물들 지하층이 침수를 걱정한다는 건, 상황에 따라서는 도시기능의 마비와 대혼란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내리는 빗물과 흐르는 물을 강제하겠다는 저 무지(無知)는 단 한순간의 재난으로 도시가 사라지는 사례를 역사에서 읽을 능력이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비가 내리고 물은 하천과 땅속을 흘러 하늘에 다시 오르는 물의 흐름과 순환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광화문, 아니 서울은 인간의 미래 도시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하수구를 자꾸 더 크게 늘려서 하수구에 들어가는 물의 하수처리로 홍수를 줄이는 식으로 맞서겠다는 식의 어리석음은 땅속으로 물길을 만들고 도시 여기저기에 물을 담아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자연에 대한 저 간명한 이치도 저들에겐 잘 납득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권력 이래로 무지와 영악함으로 뒤범벅이 된 참으로 기괴한 권력의 등장이 초래한 오늘 대한민국현실이란, 바로 임옥상이 그림으로 그린 ‘광화문’ 현실이다. 

성장과 발전이란 광기로 치닫는 이명박 집단, 이들의 자화상이 곧 홍수난리의 ‘광화문’이며 그런 ‘광화문’엔 인간이란 설 자리가 없다. 용산강제철거사태, 한진중공업사태 등에서 보듯이, 불법포식재벌자본에 의한 사설 보안경비용역의 폭력을 방조하는 부패한 국가공권력이란 바로 민주주의 압살이다. 부패한 자본에 포섭된 자본주의 하수(下手)로의 공권력이 일사분란하게 작전하듯이 민(民을) 억누르고 대자본의 사설폭력이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면서는 사법체계, 행정시스템, 시장질서, 심지어 국가질서까지 이미 시궁창이 됐다. 국가 상징 거리인 ‘광화문’이 저 지경인 것은 자본이 동원하는 용역깡패를 국가가 묵인 방조하면서 심지어 무모하게도 공권력이 한패거리가 되어 민에게 들이닥쳐 깨고 부수고 짓밟는 식으로 죽은 정치를 정치라고 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 때문이다.
 실종된 국가의 공공성 공권력이 부패자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국가는 겨우 형해(形骸)만 남았다. 곧 인간 없는 광화문이고 인간 없는 세상이다.

임옥상의 ‘광화문’이 질식할 것만 같은 층위로 분홍색 물감이 가득 넘쳐 충분히 위험한,
인간 없는 세상이란, ‘광화문’의 실상이자 짙은 분홍색은 붉은 핏빛의 ‘알레고리’이다.

여기서 임옥상의 회화는 서울서 1000Km 남짓 떨어진 일본 후쿠시마 재앙의 잿빛과 마주한다.
임옥상의 상상력에서 일본은 바닷물에 잠겼고 후지산만 겨우 남았다. 장대하고 웅대한 4000m 높이의 후지산은 이제 마지막 끝자락만을 겨우 남겨놓고 시퍼런 바닷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잠길 듯 말듯 아주 작게 버티면서 솟아있다. 


이웃 일본에서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났지만 
일본국의 상징인 ‘후지산’은 작은 끝 봉우리만 간신히 남긴 임옥상의 대형그림 ‘후지산’(oil on canvas 456cm*182cm)에서는 또 다른 어둠의 심장이고 암흑의 핵심이다.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나자 한국 정부는 대지진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더라도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손사래부터 쳤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의 원자로 노심이 모두 녹고 기류가 일본에서 한국 방향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모의실험을 한 결과가 울릉도 주민의 피폭량은 0.3 밀리시버트로 인체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준으로 나왔다고까지 강변했다.

“흉부 엑스레이 세 번 정도의 피폭, 이렇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한 국가의 경영을 책임지는 정부의 발표일 수 없다. 원자력연구소 과학자의 언어로 외피를 걸쳤지만 이는 ‘과학과 문명이란 미몽’에 포로가 된 원자력사업 말단종사자의 불쌍한 연명을 통해 정부가 자기변명을 한 것일 뿐이다.
후쿠시마 사태는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니다. 후쿠시마 원자로 방사능 방출 사태는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필사적인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주식회사 CEO’인 ‘간 나오토’ 일본국 총리까지 후쿠시마 원자로에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면 동일본이 무너지는 (일본의 1/3이 괴멸되는)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이는 방사성물질 확산에 의한 광대한 지역에 위험한 영향을 줄 것이란 위기의식을 일본 수상이 직접적으로 아주 솔직하게 드러낸 말이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대량 방출 사태는 사고 직후부터 발전소 반경 30km의 인구 34만 명 대부분이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지금은 유령 도시가 여기저기에 생기고, 피난 간 일본인들의 정처(定處)하기 어려운 삶을 사는 일상을 보면서 인간의 삶을 일시에 파괴시킨 현실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라는 사실에 새삼 경각(警覺)하게 된다.

문제는 후쿠시마 원자로 사태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대기와 바다로 방출되는 방사성물질에 국경이란 아예 없다. 또한 핵발전소가 21개나 가동 중인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안전제일주의의 일본과 비교해 어떨까? 참으로 오싹하다. 핵발전소에서 쓰고 남은 연료를 저장하는 시설인 핵 폐기장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현재 경주에 지어지고 있는 핵폐기물 저장시설은 하루에 3000톤의 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퍼내고 막아내느라 공사가 지연되고 있고 시설이 완공되기도 이전인데 폐기물은 이미 반입되었다. 

지하수가 방사능에 오염될 수 있으며 오염된 물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들어갈 위험도 있다.
이런 처지의 현실이고 후쿠시마 사고가 난 직후인데도 전체 수주액 186억 달러 가운데 100억달러(약 12조원)가량을 한국 정부가 수출입은행을 통해 대출해주기로 했으면서도 공사대금만 수백억 달러에 달한다며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의 핵발전소 건설 뻥튀기 수주계약에 이명박이 비행기를 타고 뛰어든 것을 엄청난 영웅담처럼 각색하는 기득권신문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보도란 대체 어떤 무지에 그리고 어떤 영악에 기인하는 것일까?

지구생물권을 불모로 돈벌이에 미친 원자력 기득권 체제를 떠받치는 정치세력과 자본세력, 기득권 언론세력들의 공모와 협잡은 자신들의 사익(私益)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 죽어 나가는 죽음의 흥정도 불사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人三郞)는 그가 쓴 책 <우리들 체르노빌의 포로들1987>에서 “원전(原電)이 갖는 반인간성, 반사회성, 범죄성은 그 위험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은 생물과는 본래적으로 상용(相容)할 수 없는 방사능을 끊임없이 생산할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를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아가서는 하청, 재하청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쓰고 버리며, 인심을 황폐케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저는 산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 희망을 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까지 왔으니 이제 별수 없잖아, 안 그래? 거의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원자력기술자의 체념이 바로 재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까 신념을 가지고 희망에 차서 반대하는 일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원자력을 없애자는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을 하자는 겁니다.”라고 했다. 


임옥상의 일본침몰과 후지산
일본침몰을 그린 임옥상의 ‘후지산’은 무한대의 자본증식만을 꿈꾸는 국가주의자를 표방하는 기득권자들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과연 만들어내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임옥상의 그림 ‘후지산’은 원자력발전의 문제가 단순히 원자력발전소에 반대하는 비좁은 입장만이 아닌, 앞으로 태어나는 다음 세대에까지  사악하고 범죄적인 불을 넘겨서는 결코 안 된다는 역설(力說)을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이고 더 나아가 살기 위해서는 닥친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방식으로의 회화이다.

사고 발생 여섯 달이 가까워오는 지금 시점에서도 후쿠시마 사태 수습 전망은 여전히 미궁이다. 안개 속 같은 후쿠시마의 진로는 임옥상의 상상력에서는 일본을 침몰시켜 ‘후지산’의 최정상 약간만 남겨놓았고, 이어서 중국 황사(黃紗)현상의 모래바람으로 베이징의 자금성이 붉은 모래먼지에 뒤 덥혀져 있는 광경을 그린 대형그림 ‘자금성’(oil on canvas 456cm*182cm)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없는 세상, 황사에 폐허가 된 임옥상의 자금성 
명·청조 500여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고,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9000여개의 방, 50m 너비와 깊이 6m인 거대한 해자(垓字)를 갖춘 미로 같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인 자금성은 임옥상의 그림에서는 온통 붉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궁궐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기고 있다.   

중국의 CCTV가 만들었던 6편의 특집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하상(河殤)(소효강·왕노상 지음, 홍희 옮김, 동문선 펴냄)이란 번역 책이 있다. 그 책을 보면 중국 사회는 장기적으로는 정체된 구조를 유지해 온 사회라고 보는데, 이는 농경 사회가 계절의 순환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한 왕조가 세워지고 또 붕괴되고 새로운 왕조가 되풀이 되는 건, 시스템의 변화 없이 왕조 교체만 반복되어 온 것이 중국 역사라고 보는 관점이다. 따라서 중국문화의 정체를 벗어나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시스템 자체를 과감하게 파괴시켜야 한다고 책에서 주장한다.

개혁 개방이후 끊임없이 내부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이런 주장은 지극히 위험한 주장으로 인식되었다. 13억 4천 3백만을 넘는 인구와 시장자본주의의 욕망이 질주하는 G2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앞으로 전개될까?

오늘날 중국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협요소는 극단적인 빈부 격차와 인민들의 불만, 한 자녀 갖기의 결과로 외동아이 1억 명, 낙태시술의 증가로 나타난 독신남의 인구 4천만 명, 2억4천만 명의 불안정한 직업의 농민공, 연 1천300만 명씩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오는 농민공의 증가추세, 하루에 수많은 자살자, 년 20만 명의 어린이들 유괴, 만연해 있는 부패와 '콴시'(关系)를 법보다 앞세우는 사리사욕, 경제발전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자연파괴 등은 반드시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다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대중국의 문제는 이미 세계문제가 됐다. 임옥상이 그림으로 그린 ‘자금성’은 정녕 황사먼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는가? 


진실로 인간은 자연의 미세한 일부

임옥상의 미술전시가 보여주는 apocalypse now에서 인간에게 희망은 있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 이번 전시에서 화가는 그가 미술작업의 질료로 사용해 왔던 종이와 철과 흙을 통해 자연 속에서 만물은 생성, 성장, 쇠퇴, 사멸의  과정을 지니게 마련임을 말하고 있다.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고, 생(生)과 사(死)가 이어져 있는 자연현상임을 그의 미술은 갈파(喝破)하고 있다.

여기엔 어떤 예외도 없지만 유독 원자핵이라는 이 기이한 물질만은 예외적으로 드러냈는데, 이것이 회화 ‘후지산’에서 보이고 있는 종말(終末)이다. 생태계에서 인간의 잘못된 지식이 만든 물질인 이 인공 방사성물질은 전쟁 기계인간의 산물로 인류의 짙은 어둠을 말하고 있다. 이 어둠의 심장과 암흑의 핵심을 어떻게 인간은 마주할 수 있을까?

임옥상의 회화 ‘후지산’은 그래도 우리는 끈질긴 신념을 가지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원자력을 반대하고 종내는 원자력을 없애자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하자는 것으로의 그림으로 회화성(繪畫性)이다.


지상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고 맺어져 있다.

연기설(緣起說)인가? 차라리 나는 과학이다. 모든 사상(事象)은 항상 서로 관계되어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적·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로의 과학 말이다. 그렇다. 임옥상의 미술은 ‘인간 없는 세상’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역설(逆說)로 이제 다시 인간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는 문명과 자연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그의 회화 ‘꽃 시리즈1 (oil on canvas 1000cm*130cm)에서 보여주는 색색의 약동(躍動)에서 그가 제시한 미래는 언뜻 보기엔 암담한 것 같지만 이 예술가는 지레 단정 짓지는 않았다. 역설이지만 차라리 그의 회화 꽃처럼 세상은 또 밝다.

화가는 말하기를, “인간 없는 세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앨런 와이즈먼이란 저널리스트가 쓴 책인데,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지고 난 뒤 이틀이 지나면 뉴욕의 지하철이 침수되고 3년이 지나면 도시의 배관이 터지고 건물 벽에 균열이 생기면서 300년 정도가 지나면 전 세계 곳곳의 댐이 붕괴하며 삼각주에 위치한 도시는 물에 쓸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의 흔적이 모두 없어질 날이 올 것이란 이야기지요. 어떻게 보면 비참한 상상력이지만 수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이란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놀랄 담화도 전혀 아닌 것 같아요.”


흙에서 흙으로 가는 생명들
전시장엔 사각형 큐브로 흙더미가 세워져 있다. 제목은 ‘흙, 살’이다. 흙 표면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부조(浮彫)로 새겨있다. 그가 긴 시간 자주 작업한 종이부조 작업의 연장이지만 이번엔 흙 자체에다 인간을 새겼다는 특이성이 있다.

화가는 말하기를, "제 작품의 시작이 땅이었습니다. 제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땅. 그게 생명의 근원이 아니겠습니까? 그 땅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물, 불, 쇠 같은 매체를 다뤄봤지만 결국 그것 역시 땅인 흙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흙은 인류 모두의 삶과 죽음의 응축이며 모든 생명의 끝이요 시작입니다."

나는 이번 임옥상 전시에서 질료와 미술의 여러 매체를 다루면서 '만들 수 있는 능력과 볼 수 있는 능력'을 연결시키면서 자신의 미술을 통해 보는 이들에게 의미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에서, 그리고 그의 공공미술의 제창과 실현에서, 사회적 확장으로의 행동주의의 미술과 힘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 중에서 그의 회화들은 현대미술의 정수(精髓)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