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 윤성원의 미술에 대하여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1-09-05 19:09     조회 : 8649    

<Island,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1 Yun Sung Won photo>
<Time Dimension,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3 Yun Sung Won photo>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자연, 시간, 인간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905173437&Section=04

세계 사진 거장 KARSH(카쉬) 재단의 2010년 사진 작품 대상을 받다.

터키 령(領)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태어난 유섭 카쉬(Yousuf Karsh, 1908 -2002)는 인물사진을 찍은 세계적 명성의 사진작가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처칠과 테레사 수녀, 그리고 오드리 헵번 등 수많은 유명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작가가 바로 그다. 카쉬는 미국에 ‘카쉬예술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서 첫 번째로(2010년) 수여하는 사진작품상을 받은 미술작가가 한국인 미술작가 윤성원이다. 

나는 한 미술작가의 성장을 본다. 

지금부터 만 8년 전인 2003년 한 젊은 미술작가의 첫 전시 카탈로그에 나는 글을 썼다. 당시 그 글의 제목이 “한 젊은 작가의 등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윤성원과의 만남은 2001년 봄 미술대학 대학원 학생들이 내 스튜디오로 찾아 와 내가 그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특강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정녕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으며 우리들 나날의 삶에서 의식의, 실재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 그리고 미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 스스로 의문을 갖기를 주문했다. 그 때 그 특강 며칠 후 몇 점의 에스키스와 그림물감이 덧칠해져 있는 스케치, 작은 유화 그림을 들고 나를 다시 찾은 학생이 윤성원이었다. 난 그 때 그 학생이 보여준 작업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그 반가움의 정체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진솔하고 소박한 표현으로 지금 사람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를 그가 미술의 대상으로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 당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대상과 소재는 바로 식물(植物)이었다. 그 중에서도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속에서의 뿌리의 움직임과 뿌리의 형상들, 그리고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변화, 그것의 연속적인 흔들림들, 이처럼 식물이 지니는 시간의 변화와 움직임에 대한 그의 시선은 차분했다”고 나는 글에서 얘기했으며 그 글에서 그의 미술은 “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스케치들, 조금씩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다른 이미지의 연쇄성과 몽따쥬같은 흑백의 거칠고 꼼꼼한 점묘(點描)들. 이는 마치 나무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회화적 표현을 말한다. 사실 뿌리는 땅속에 있으면서도 강력하고도 은밀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땅 밖으로도 나무에 줄기에 잎에 성장을 부추긴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림에서 강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무를 볼 때, 땅 밑에 나무의 뿌리에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게 마련이다. 나무의 겉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출렁거림은 시선이 머물지만 그 밑에, 땅속에, 대지 속에, 근원적인 근거인 뿌리에 대한 상상은 이렇듯 작가의 눈에서만 자연스럽게 투시되고 있다.”고 했으며 그의 미술은 특장(特長)은 “오늘날 사람을 포함한 생태(生態)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인 중요한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들 삶의 근원을 뿌리 채 흔들어 놓기 시작하는 온갖 문명의 부정적인 결과들과 행태들, 이것으로부터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 당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과 발견에서 그녀의 회화적인 출발이 있음을 보게 된다.”고 썼다. 
http://www.kimsangsoo.com/g4/bbs/board.php?bo_table=news01&wr_id=5&page=48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의 윤성원 미술 

그리고 2005년 윤성원의 두 번째 미술전시 카탈로그에도 비평의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윤성원의 회화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생각의 단서를 <나무뿌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윤성원의 메타포이지만 조금이라도 윤성원의 회화에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본다면, 이내 그녀의 회화적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으며 이는 나무뿌리를 통해서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젊은 화가의 역량이 더없이 소중함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오늘 날 회화 또는 미술이 온통 상업적 소비의 무차별 경쟁 속에 빠져들어 기꺼이 소모되고 심지어 환금성(換金性)의 상품으로 팔릴 것을 안달하는 미술계 세태에서 한 젊은 작가의 뚜렷하고 집중적인 <나무뿌리>의 회화적인 관심과 표현은 참 대견한 것이다. 이는 생태적인 대상과 관심이란 회화의 주제적 측면도 있지만 질박(質朴)하고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 진실하게 회화작업과 마주하고자 하는 이제 20대 후반의 이 젊은 작가의 정신은 이 땅의 미술 풍토에서는 상찬(賞讚) 받아야 마땅하다. 

자연의 위기, 사회적 인간적 위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이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임을 더 명확하게 볼 필요가 있으며 주위에 눈에 보이고 있는 여러 사실만으로도 우리들 삶의 터전이 자꾸 붕괴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윤성원이 회화로 그리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地下)의 <나무뿌리>를 그녀가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이지만 ‘잘 보이지 않고 잘 드러나지 않는’ 땅 밑의 생태를 통해 인간 생존의 터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은유에는 윤성원 회화를 통해서 거듭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새삼 일깨우게 된다. 이는 윤성원 회화의 힘이다.

예민한 촉수(觸手)로의 미술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포함 세계인들 대부분은 지난 100여 년간 근대화 콤플렉스에 중독되어 경제발전과 계속적 성장이라는 미몽(迷夢)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예민하게 촉수를 세우고 세상을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 사회와 삶의 터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얘기를 왕왕 들을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기보다는 적당히 문제를 가리고 곡해(曲解)하여 문제를 더 희뿌옇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땅 밑에 있는 <나무뿌리>에 윤성원은 시선을 두고 있지만, 그 <나무뿌리>의 뻗어남과 엉킴과 끊어짐에서 자연의 절멸(絶滅)과 순환과 생기(生起)를 통해서 자연은 ‘강제하거나 외면하거나 왜곡(歪曲)한다’고 해서 그 자연성(自然性)이 결코 달라짐이 아니라는 역설(逆說)을 회화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임을

윤성원의 <나무뿌리>를 통한 시간의 경과와 채집은, 인간이 땅 밑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힘을 잃게 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우리들 삶은 만물과 서로 맺어져 끊임없이 삼투(滲透)하여 상관하며 관계한다는 자연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인식을 요청한다.
이처럼 윤성원의 자연의 <나무뿌리>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밑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한다.”고 나는 한국에서의 그의 두 번째 전시회(2005년) 카탈로그에서 말했었다.

세월이 흘러 2011년, 회화 그리고 사진

최근 나는 미국 보스턴에서 미술작업을 하던 윤성원이 일시 귀국해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제 그의 나이 만 33살이다.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내가 그를 만난 지 벌써 10년째다. 그동안 그는 ‘낯선 나라’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 가서 그의 미술작업은 더 넓어졌고 깊어졌다. 미국의 현대예술은 세계의 현대예술을 합종연횡(合從連衡)하는 예술일 것이다. 아마. -필자는 아직 미국을 가본 적 없다-
 그 미국사회에서 윤성원의 미술작업은 크게 진전되어 그 성과로 2010년 카쉬재단에서 "Yousuf Karsh Prize in Photography" (Awarded by Yousuf and Estrellita Karsh) 아이슬란드를 찍은 사진으로 첫 번째 카쉬사진상을 수상했다. 
 

냉동과 충일

그가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2009년 1월의 겨울풍경 사진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은 내게 퍽 인상적으로 보였다. 엄청난 추위로 냉동된 아이슬란드에서의 겨울 풍경을 보면서도 마음의 온도는 거꾸로 충일(充溢)했다.
고대자연이 숨 쉬고 있는 아이슬란드 겨울풍경은 윤성원에게는 시간과 영원을 향한 물음에 안성맞춤이었을 풍경이었다. 아이슬란드 풍경을 찍은 그는 그의 사진에 대해 말하기를 “오랜 세월을 버텨온 아이슬란드의 설원은 변화의 역사, 시간의 중첩,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나타내는 변화를 지금의 절대 고요로 표출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지질학적 과정의 일시적인 동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진으로 포착된 감성적인 구조를 통해 공간의 현상학과 형태의 기하학을 재현한다. 아이슬란드의 겨울 바다와 육지 표면의 반사 표면은 구름으로 가려지면서 고요하고 영원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나의 작품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중심에서 하늘의 고요와 땅의 고요는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의 일부가 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외부 세계의 통일을 증언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여름(2010년) ‘아메리칸 아트’에서는 미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젊은 예술가로 활동하는 2명의 젊은 작가에게 심사를 거쳐 수여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장학금 선정자로 윤성원을 선정했다. <Terra Summer Residency Fellowship /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2010> (one of two American artist fellows) 그 장학금을 받은 윤성원은 프랑스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치고 또 다시 올해 초 아이슬란드로 다시 날아가 그 나라의 풍경을 새로 찍었다.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의 흔적

윤성원이 보스턴박물관에 전시된 6세기 중국조각품을 사진으로 찍은 것은 우연한 발견에서 그만의 작가의식으로 새로운 시간의 해석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보스턴박물관의 6세기 중국 조각작품 사진은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고대의 시간을 현대의 시간에서 사진으로 그가 재 포착한 것인데,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기를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아득한 과거에 만들어진 조각을 응시할 때, 나는 표면과 형태를 넘어선 시간의 새로운 차원을 볼 수 있으며, 보다 단단한 무언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명상을 통해 깨어나서 사물의 중핵(core)과 정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거의 지각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다. 이 지점에서 모든 시간의 차이는 사라지며, 이러한 고요는 지각과 경험의 동시간대 통일을 암시한다.”고 답한다.

꾸준한 젊은 미술작가의 생장(生長)을 지켜보면서

이 젊은 작가 윤성원(http://sungwonyunstudio.blogspot.com)의 생장을 지켜보는 나는 즐겁다. 더구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예술작업을 밀고 나온 지난 10여년 세월, 나는 그의 모습과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성실하고 일관되게 세상에 대한 자기인식에의 해석을 담아내는 그의 미술작업을 내가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2005년 윤성원전 카탈로그 글-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
윤성원의 시간채집

1.
일상의 삶에서 보다 더 나은 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자기 스스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대상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사유하고 파고드는 한 젊은 화가를 만날 때면 더 없이 기쁘다.
어느 듯 젊은 화가 윤성원과의 만남도 만 5년째에 접어든다.
윤성원의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모름지기 딸자식에게 세상을 반듯하게 보는 법을 가르치신 것 같다. 내가 윤성원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몸놀림의 매무새가 단정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점이다. 더하여 차분하게 ‘사물’이나 ‘상황’을 응시(凝視)하고자 하는 진지한 열정을 본다.
그렇다. 모름지기 화가란 ‘사물’과 ‘상황’에 대한 끈덕진 응시와 정열적으로 파고드는 열정의 힘에서 비롯된다.

윤성원의 첫 전시회 때, 나는 그녀의 전시 카탈로그에,
“그녀의 회화는 이제 보다 더 성숙한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연에서 마음을 보는 그녀의 눈은 아주 소중하다. 이 소중함이야말로 단연 더 깊고 더 넓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썼다.

윤성원의 일본 오사카 전시 이후 세 번째인 이번 전시에서 나는 윤성원의 회화적 성장과 사색의 힘을 엿본다.
그동안 시간이 흘렀다. 첫 번째 전시와 두 번째 전시를 가지는 그 시간만큼.
그 사이에 윤성원은 결혼을 했고, 여러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됐다. 그렇다. 자꾸 배우고 알고 깨치는 것이다. 삶을, 세상을.

한 달 전쯤에 윤성원의 안내로 윤성원이 두 번째 전시를 할 장소인 <한전아트센터> 전시장을 가 본적이 있었다. 큰 전시장이었다. 전시장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천정도 높고.
난 윤성원에게 “그림이 커야 하겠다. 옹색하게 그리지 말고 시원시원하게 칼라풀하게 그려서 내다 걸어라”라고 얘길 했다.
윤성원은 결혼 생활에 따르는 대소사가 있었고 강의를 다니는 등, 자신의 일상이 더없이 분주해졌고 또 큰 전시를 앞두고 나름대로 시간에 쫒기고 시달리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젊은 화가의 모습에서 성장해 나가는 면모(面貌)를 읽을 수 있었다. 보다 더 단단하게 사물과 상황과 세상의 지평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성숙한 표정을 보았고, 자신이 표현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회화적 대상에 대한 탐구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선생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꾸미고 모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두 번째 전시를 하겠다고 윤성원은 말했다.

나는 윤성원의 첫 전시회의 카탈로그에 쓴 것처럼 거듭 얘기하지만,
“나무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어 땅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볼 수 없는, 그 뿌리”를 회화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파고드는 윤성원에게서 나는 작가로의 화가, 그 가능성을 본 것이다.

마치 윤성원이 겪는 시간의 변화와 시간의 틈새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채집을 해 나가는 회화적 대상인 <나무뿌리>는 꼼꼼한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그녀 삶의 모습에서 많은 긍정적인 가능태를 보는 것이다.

“나무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윤성원의 회화적 표현은” 자신의 일상의 변화를 맞는 그녀의 일상만큼이나 비례한다.
삶이 더 깊어진 것이다.

2.
윤성원의 회화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생각의 단서를 <나무뿌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윤성원의 메타포이지만 조금이라도 윤성원의 회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본다면 이내 그녀의 회화적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나무뿌리를 통해서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젊은 화가의 역량이 더없이 소중함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오늘 날 회화 또는 미술이 온통 상업적 소비의 무차별 경쟁 속에 빠져들어 기꺼이 소모되고 심지어 환금성(換金性)의 상품으로 팔릴 것을 안달하는 현대미술 세태에서 한 젊은 작가의 뚜렷하고 집중적인 <나무뿌리>의 회화적인 관심과 표현은 참 대견한 것이다.
이는 생태적(生態的)인 대상과 관심이란 회화의 주제적 측면도 있지만 질박(質朴)하고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 진실하게 회화작업과 마주하고자 하는 이제 20대 후반의 이 젊은 작가의 정신은 이 땅의 미술 풍토에서는 상찬(賞讚) 받아야 마땅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이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임을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주위에 눈에 보이고 있는 여러 사실만으로도 우리들 삶의 터전이 자꾸 붕괴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음은 이제 명백한 사실이다. 윤성원이 회화로 그리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地下)의 <나무뿌리>를 그녀가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이지만 ‘잘 보이지 않고 잘 드러나지 않는’ 땅 밑의 생태를 통해 인간 생존의 터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은유에는 윤성원 회화를 통해서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새삼 일깨우게 된다. 이는 윤성원 회화의 힘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지난 100여년간 근대화 콤플렉스에 중독되어 경제발전과 계속적 성장이라는 미몽(迷夢)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예민하게 촉수(觸手)를 세우고 세상을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 우리 사회와 삶의 터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얘기를 왕왕 들을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기보다는 적당히 문제를 가리고 곡해(曲解)하여 문제를 더 희뿌옇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땅 밑에 있는 <나무뿌리>에 윤성원은 시선을 두고 있지만, 그 <나무뿌리>의 뻗어남과 엉킴과 끊어짐에서 자연의 절멸(絶滅)과 순환과 생기(生起)를 통해서 자연은 ‘강제하거나 외면하거나 왜곡(歪曲)한다’고 그 자연성(自然性)이 결코 달라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회화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윤성원의 <나무뿌리>를 통한 시간의 경과와 채집은, 인간이 땅 밑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힘을 잃게 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우리들 삶은 만물과 서로 맺어져 끊임없이 삼투(滲透)하여 상관하며 관계한다는 자연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인식을 요청한다.
자연의 <나무뿌리>와 인간, 우리들은 윤성원의 <나무뿌리>를 통해서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밑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3. 
윤성원의 회화성(繪畫性)은 단순하다. 이는 그녀가 사물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에서 솔직함과 성실함이 그녀의 붓질에서 그대로 묻어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윤곽은 분명하고 물감의 번짐과 흘러내림도 자연스럽다. 때때로 흘러내리고 번지는 것에도 ‘더 절제할 수 있는 긴장’을 나는 그녀에게 몇 차례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내 의견은 윤성원이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더 집중력이 있기를 말한 것이고 그림의 공간성이 더 확연하기를 기대하는 바램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윤성원은 변화를 통한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느리고 굼뜨고 완만한 변화로 보여지지만 자연스럽기도 하다. 회화의 방법과 태도에서 진지한 한 젊음과의 대면은 싱그럽다. 5월의 햇살처럼.

                                                                        200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