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인 김수근의 정체성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1-11-04 19:42     조회 : 5084    

건축인 김수근의 정체성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4027.html

이 글은 고인(故人)인 건축인 김수근의 윤리나 과오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이 아니다.
그가 정작 ‘건축가’인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까닭 없이 그를 깎아내릴 뜻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실체를 모른 채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계속 떠받드는 우리사회 문화적 태도에는 이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인권도시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시는 5.18민주화항쟁을 기리고자 ‘광주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신축 문화재단 건물 옆, 재단이 관리하는 ‘김수근 아트 스페이스’라는 명칭의 큰 간판을 내건 건물, ‘김수근’, 이름  석자가 과연 ‘인권도시 광주’에 합당한가? ’틀렸다,
이건 아니다.’ 피 흘리며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광주의 영혼들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이는 ‘광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김수근’이란 이름을 들어본 많은 사람들, 심지어 건축계 사람들도 김수근의 정체를 몰라서 초래된 사례다.
그러기에 내가 의문으로 제기한 ‘김수근 아트 스페이스 명명 배경’에 광주문화재단 측도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한국 현대 건축의 대표적인 1세대 건축가로 건축가로서의 사명감, 자연과 인간의 조화, 전통과 현대에 대한 고민 등 한국 건축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산 증인으로 빛고을 시민문화회관 별관(구 전남도체육회관)은 광주시에 유일한 ‘김수근’ 작품인 관계로 건축물 보존 및 재활용 가치를 제고하고 문화관광의 명소로 만들어 줄 것으로 크게 기대하고 ‘김수근’ 명칭 사용 필요하다고 판단”

그럴 수 있다. 이는 김수근에 대해서 알되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김수근이야말로 철저하게 반민주 반인권의 독재정권에 협력하면서 자신의 건축적 성과를 이룬 건축인이다.

대표적 건축인 88올림픽 주경기장,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지은 워커힐 호텔의 힐탑바, 서울 남산의 한국자유총영맹 본부인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육사 교훈탑,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대법원, 치안본부 등, 그가 지은 대형 건축물은 많다. 급기야는 개발독재정권의 대규모 국가 건설기획을 전담했던 한국기술개발공사 대표이사를 다년간 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 서울 용산의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이다.
전두환 말기 경찰의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열사(당시 23세)의 사망 현장, 김근태 민주당 고문이 1985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했던 곳, 숱한 민주인사들의 수난의 현장. 이 건물은 고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구조를 가졌다.

7층의 건물에서 고문실이 있는 5층만 유독 창문이 아주 작게 설계되어 있다.
끌려온 이들은 길고 어두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어긋나게 배열된 문들을 지나 철문으로 들어갔다. 공간 전체가 이미 인간의 의식과 의지가 저절로 무너져 내릴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폭력적인 구조의 건물 설계였다.

 ‘김수근’ 이름을 내세워 “문화관광의 명소로 만들어 줄 것으로 크게 기대”한 광주시는 당장 건물의 이름을 고쳐야 한다. 그 건물을 부술 필요야 없겠지만, 설계한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과, 과연 그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 합당한가의 여부는 따졌어야 옳았다.
81년 7월, 당시 주한 미국대사 워크를 서울 인사동 기생집 ‘동원’에서 전두환 쿠데타 실세 허화평 허삼수에게 소개한 이도 김수근이다. 군부독재집단과의 내밀한 연관을 본다. 

일본 신사(神社)를 연상케 하여 왜색 시비를 부른 옛 부여박물관을 비롯, 그가 설계한 건물들이 정말 한국의 정조(情調)에 기반을 둔 것인지도 다시 봐야한다. 더하여 나는, 그가 제 정신을 가진 ‘건축가’였는지도 의심한다. 그가 지은 서울 남산,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자유센터’ 도로변 긴 석축(石築)의 석재는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성벽을 뜯어다가 축대의 석축으로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1차 도성 축조 당시 경상도민이 축조한 구간인데, 자유센터 축대에 사용된 석재 중에 인근 ‘경주시(慶州始)’와 ‘강자 육백척(崗字 六百尺)’의 각자(刻字)가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건축가’ 이전에 지식인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