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것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3-10-27 10:03     조회 : 10084    



2001, 신춘문예 심사평

오랫동안 난 원고지에 글을 썼다.
요즘은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쓰곤 했다.
원고지에 글을 쓸 때면 왠지 글이 더 단정해지는 것 같았다.

요즘은 글을 자주 쓰지 못하고 있다.
요 몇년은 희곡이나 시나리오도 쓰지 못하고 있다.
쓰고 싶은 간절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불행인가? 다행인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않는다.

글은 정신과 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으로 써야하는데.
2000년에 갑자기 문화관광부에서 연락이 와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장이란 '어마어마한 감투'(?)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무렵 한국의 요즘 시와 소설을 한꺼번에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유명하다는 여자 소설가들도 만났고 상을 받았다는 남정네들, 그들이 건네주는 소설을 봤다. 잘 팔린다고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책 첫 페이지를 들치자니 지저분하단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하나같이 너저분할 뿐 아니라 더럽기까지 했다.
문장도 엉망이었고 더 읽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란다.
대부분의 시들도 허접한 감상이나 열패감의 나열로 채우고 있었다.
책을 든 내손이 지저분하게 느껴졌고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자꾸 나무만 베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들의 글에는 언어도, 존재도, 관념도 없었다.
그냥 제스처, 그 숱한 말놀림만 있었다.

또 몇 년 전엔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를 본적이 있었다.
100편 이상의 연극대본 응모작을 읽는데
심사를 봐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읽어야만 하는 내 처지가 다 한심했다.
정월 며칠 날 신문에 심사평이 실리니 평을 써달라고 기자가 그믐날에 연락을 해 왔다.
그냥 단숨에 심사평을 썼다.
신문에 심사평이 실리자 기자한테 몇 통의 항의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너무 거칠다고.
항의전화를 나한테 돌리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앞으로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그 때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이듬해는 신춘문예 심사를 해 달라는 신문사도 없었다.
그때 신문에 쓴 그 심사평이 내 홈폐이지 어딘가에 있다.
그 심사평을 여기 다시 옮긴다.
어쩌면 나도 내가 쓴 심사평을 보면서
내 스스로 내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라도 한다면 글을 다시 쓸 수도 있을까?
그 '간절한 글'을 말이다.


<2001년 신춘문예 희곡부문 심사평> 극작가, 연출가 김상수

희곡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연극 공연을 전제로 글을 쓰는 작업이다.
우리가 희곡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의 껍질(殼)을 한 꺼풀씩 깨고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연극을 보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연극 만들기를 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것의 본질에는 인간이 세상을 알려고 하는 저 무한한 욕구를 의식하기 때문이다.잃어버린 것, 감추어진 것, 외면한 것,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자기 시간 속에 담고 싶은 이야기들, 시간과 공간을 빚어내는 추체험(追體驗)속에서 삶의 사실도 찾아내고, 좀 더 생생하고 사실적인 그 무엇을 보고자 알고자 꿈꾸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 100여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꼼꼼하게 읽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읽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도대체 당신들은 희곡을, 연극을, 정말 알고 나 있는가?
희곡이, 연극이 삶을 살면서 얼마나 중요 한 것인가를 정말 알고 나 있는가 말이다.
더러웠다. 연극 희곡(戱曲)의 언어가 아니었다. 조악했다. 거칠고 상스러웠다.

연극의 언어는 결코 개그가 아니다. 연극의 장면은 저 지루하고 상투적인 일부 텔레비전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말장난이나 지겨운 삶의 되풀이 장난이 아니다.
연극의 언어나 장면은 진지한 열정으로 삶을 '바로 보는’ 것이고 잘근잘근 삶을‘깨물어 보는 것’ 이며 ‘끈질기고’ '겸손하게’ 인간의 존중과 인간의 위엄과 인간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태도다.
그럼 과연 작가란 무엇인가?
물론 연극을 통해서 인생의 정답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연극을 통해서 삶을 꿈꾸며 생을 탐구하고 삶의 지평을 넓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갖가지 개성이 충돌하고 의견과 말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작가는 가로 세로로 인생의 의미를 직조(織造)하고 구축해서 인간과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란 나름대로 세상에 부지런하고 자신에 엄격하며 정직한 언어로 자기 자신에 치열할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없다.

이번에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아니, 당선시킬 작품이 없었다.
인간을 그리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세상을 그리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대체로 설익었다. 지겨운 제스처가 난무했고 세상을 보는 데,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제대로 구분이 어려웠다.

2001년 01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