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문화재를 되찾은 것, 정조문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다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3-06-10 19:04     조회 : 7473    

문화재를 되찾은 것, 정조문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다.
下 - ‘일본속의 조선문화’ 교토(京都)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991

사진 1. 목조아미타불삼존불감 木造阿弥陀三尊仏龕 조선시대 1689년, Gilt Lacquer Wooden Alter Housing the amita Triad, Joseon Dynasty,1689. H 47.6 W 33.1 D 28.0㎝

사진 2. 백자호 白磁壺 조선시대 17세기 후반, White Porcelain Jar Joseon Dynasty,latter half of 17th century. H 28.5㎝

1988년 10월 25일 교토 고려미술관 개관

드디어 1988년 10월 25일, 정조문이 그렇게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40년 이상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재산을 투입해,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 1700점을 되찾아 고려미술관은 개관되었다. 소장품은 이미 1950년 한국전쟁 이전이나 한국전쟁 중에 고국인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1,700점의 미술품이다. 고분부장품부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도자기,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정조문이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를 만난 지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조문은 미술관을 개관하기까지에는 자신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수명(壽命)을 역산(逆算)하여 분투(奮鬪)하면서 미술관 개관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고투(苦鬪)였다. 그리고 그의 미술관 개관에 대한 염원은 미술관 개관 15년 전인 1973년 마이니치신문에 “문화재를 보유하는 자의 의무”라는 제목의  글로 표현됐다. 

“최근 어느 여자 대학생 두 명이 조선 도자기를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실제로 조선시대 항아리를 어루만지면서 감동하여 눈이  반짝거렸다. 책이나 사진으로 얻은 지식의 몇 배가 될 느낌을 하나의 항아리를 통해 느꼈던 것이다. 유물을 보면서 눈앞이 밝아지는 기쁨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망은 미력한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한정된 사고방식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것을 사적으로 소장하며 은근히 애호하는 일은 문화재를 보유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네 기둥에 지붕이 있는 단순한 건물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어떻게든 조선미술관을 실현하고 싶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기사, 1973. 12. 7)

정조문은 왜? 일본 교토에 ‘조선 미술 전문미술관’을 세웠는가? 

정조문이 ‘조선의 문화재’를 전시하는 전문 미술관을 세운다는 구상은 삽시간에 일본문화계에 퍼져나갔다. 오사카의 히라카타시(枚方市)에서는 세 번이나 미술관 유치 이야기가 있었다. 히라카타시는 한자천자문을 백제로부터 전해주었다는 왕인(王仁)박사와 인연이 깊었다. ‘왕인’은 백제의 외교관, 학자, 화가로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백제의 제13대 국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 ?~375년, 재위 346년~375년)의 맏아들인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322년~384년, 백제의 제 14대 국왕, 재위 375년~384년)의 명을 받아 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일본으로 ‘왕인’은 건너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와니'(일본어: 王仁 わに), 고서기 (古書紀)에서는 '와니키시'(일본어: 和邇吉師 わにきし, 화이길사, 吉師는 백제 인명이나 훌륭한 스승에게 붙이는 일본식 존칭)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히라카타시는 이런 ‘왕인’박사와 관계가 깊고 또 한반도와 관계하고 싶어서 미술관’을 유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조문은 교토에 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는 교토가 정조문 자신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생활의 근거지가 됐고, 마치 제2의 고향처럼 각별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교토야말로 일본문화의 중심지이고 일본인들의 엄연한 마음의 고향이란 사실이다. 그런 교토에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그는 전하고 싶었다. 교토의 땅에서 빛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는 한 것이다.

남과 북이 같이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미술관이름, ‘고려미술관’ 

정조문이 미술관 이름을 ‘고려미술관’이라고 정한 이유도 있다. ‘고려’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이다. 정조문은 그 이름이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남한의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민족공동체를 표상하는 이름의 독특한 공간의 미술관으로서 이상을 실현하고 싶었다. ‘분단된 조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확고한 의지를 관철한 재일동포 1세대의 단호함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바로 잡아야 한다.

정조문의 미술관 개관에 대한 집념과 의도는 그의 생전 일본어 메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의 역사, 민화, 노래 등 편견차별을 바로 잡는 일
일본의 민주주의를 진짜의 것으로 하는 것
1세들은 통일되면 귀국한다고 소망하고
2, 3, 4세들은 일본에 영원히 머물다.
상호 이해, 차별을 없앨 것”

그러나 정조문의 미술관 개관에 이르기까지에는 자신과 같이 고락(苦樂)을 나누던 ‘동지’들과 헤어지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바로 조국분단의 문제였다. 미술관 개관 8년 전 이전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조국 분단의 상처, 동지와 헤어지다.

정조문이 일본의 삐뚤어진 한,일관계 고대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고대의 조선 문화를 축(築)으로 고대 일본을 보고자 했던 취지에서, 1969년부터 13년간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50권이나 발행하는 동안, 재일조선인 작가로 김달수,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이진희와 정조문은 각별한 동지적 관계였음은 앞글 ‘상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을 비롯하여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군사쿠데타로 전두환의 제 5공화국 출범, 그런 속에서 재일동포 세계도 둘로 갈렸다. 재일동포라면 누구라도 한국의 광주에서 있었던 참상을 보면 분노하게 된다. 1세대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때 한국의 전두환 군사정부는 김달수, 이진희 등 재일동포사회에서의 중요한 지식인 역할을 하는 그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의도에 의해서 이들의 한국 방문은 크게 보도되었고, 마치 친 북한 지식인들이 전향이라도 한 것처럼 언론에 기술(記述)되었다. 전두환 군부의 집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며진 것이다. 그러나 김달수와 이진희 등의 지식인은 반드시 친북인사는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 인사들을 지원하는 운동으로 한국의 지식인들과 공조할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한국방문 실상은 한국의 전두환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현실로 나타났다. 급기야는 이들이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인정했다’고 하는 보도까지 나왔다. 재일교포 지식인 사회는 분열되었다.

정조문과 이들이 동지가 되어 일본의 각 지역을 탐방할 때 한국이 잘 보인다는 대마도(対馬島)까지 갔고, 3명이 스크럼을 짜고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国の見える丘展望台)’인 센표마키야마(千俵蒔山)에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바보!”라고 외치던 모습은 이미 안개 낀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김달수와 이진희 두 사람은 한국에 다녀온 일을 말하지 않은 채 교토 정조문의 집에서 열린 ‘조선문화사’ 기획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이 한국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었던 정조문은 괴로워했다. ‘친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을 방문한 이유나 변명 따위도 필요 없다. 그도 사실은 가고 싶었다. 다음 해엔 형 정귀문도 드디어 고향을 방문하였다. 양친의 묘를 정비하고 교토에서 전쟁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유골을 봉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모습은 ‘우리 나그네’라는 글에 나와 있다.

“아아, 고향이여, 감개무량하다. 전경이 눈에 들어온 것도 ‘내 고향이여’ 하고 외치기에 어울린다. 역시 감나무는 없어졌다. 그 때문일까, 내 머리에 놓인 것보다 이 평야의 광대함으로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동나무가 있던 근처였던가, 나와 동생이 묻어둔 물건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들의 놀이를 말하자면 겨울에는 손으로 만든 팽이를 채찍 끝에 끈을 달아 얼음 위에서 치든가 철사로 큰 원을 만들어 V자 형태의 쇠막대기로 굴리면서 달리는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일본말로 ‘켄빠’였다. 도기 편을 주워 각자 그것을 돌에 둥글게 갈아 크고 작게 각자의 생각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생겼다고 전에 들은 적이 있음) 나와 동생은 몇 개인지 잊었지만, 오동나무 근처를 파고 그것을 묻어두었다”

죽을 때까지 남북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분단된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김달수, 이진희, 그리고 친형 정귀문의 한국 방문은 정조문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다. 확실하게 자신 만은 ‘분단된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남과 북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기실 그 무렵, 정조문의 당시 생각에는 조국에 대한 상념에 대해 이런 메모가 남아있다.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 동안, 분단된 조국은 연합군이란 이름의 외세로  전쟁터가 되어 실망과 낙담, 그리운 망향은 적이냐 우리 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원망의 조국이 되어버렸다.”

1981년에 ‘일본 속의 조선 문화’가 50회로 휴간된 이후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김달수, 이진희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무서운 결심으로 동지와 헤어진 것이다. 동지와의 결별은 정조문이 그 정도까지 엄격했다. 그리고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정조문은 혼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루바삐 ‘고려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재일조선인을 강하게 하려면 문화나 역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계간지 출간과 아울러 미술관 설립의 구체적인 계획으로 하나하나씩 진행해 나가게 된 것이다.

재일 조선인 한국인들에게 남쪽과 북쪽을 가르지 않는 ‘공통의 광장’을 만들고 싶다. 

동지의 한국행이 정조문에게는 모든 것의 재출발이었던 것처럼 정조문은 재빨리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책 발간에 따르는 재정문제 등, 주로 뒤에서 뒷받침을 담당하며 사람들 앞에서 말이 없던 정조문은 지면상의 대담에 자신의 인생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오무라수용소를 폐지하기 위하여’라고 하는 부제를 달은 잡지 ‘조선인’ (1981년 10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정조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고려미술관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쪽을 지지하는 일도 북쪽을 지지하는 일도, 그리고 성분으로 구분할 수 없는 공통의 작은 광장을... 미술관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딘가 가도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느낄 필요가 없는-필자 주)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공간은 순진무구하고 자신과 선조가 남긴 물건을 일본이라고 하는 이방(異邦)에서 봅니다. 이러한 일은 좋지 않은가요. 소박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미술관의 구상을 이야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달수와 이진희가 한국을 방문한지 반년 뒤의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점점 구체화됐고 확대되어 갔다. 교토 ‘잉글리쉬센터’가 발행하는 ‘센터 통신’(1983년 2월)에는 ‘재일 58년, 차별과 투쟁,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며’라는 주제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일본에는 조선, 한국계 학교가 170개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미술관이라든가 조선도서관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을 염원해 정말로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고려미술관이든가 고려미술자료관 같은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차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한반도 문화에서 우선 조선이라고 하는 것을 정의하고 싶습니다. 현재만을 아무리 논(論)하여도 조선 멸시라고 하는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문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인의 조선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멸시라고 하는 것은 고대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에서 시작하여 현대로 오지 않으면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대담에서는 관람객이 되는 재일동포 어린이들에게는 자긍심을,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한반도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정조문은 피력했다.

왜? 조선의 문화는 찬양하면서 조선인은 경멸하는가?

“어느 일본 지식인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란 좌담회에서 일본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왜 조선인이 만든 찻잔(필자 주-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 (井戶茶碗)’을 말하는 듯하다. 높이 8.8 cm, 16세기 조선시대)은 칭찬하면서 조선인을 경멸하는가. 도대체 일본인은 무엇인가?”

그다지 자신의 말을 나타내는 일이 없던 정조문이 그 시기에는 기고와 의견발표를 계속해 나갔다.

“그래서 미술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정조문이 일본에서 미술관 건립 의사를 표명한 것은 일본에서의 정주(定住)를 결심한 순간이었고, 그것은 동지와 결별의 의사 표시, 아니 선전 포고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조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어떤 다른 동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 개인의 재력과 자신의 소중한 지인들인 일본 지식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고독한 싸움에 도전하겠다는 태도를 천명한 것이다. 

정조문의 장남 조희두(고려미술관 상무이사)는 이 무렵의 아버지 정조문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증언하고 있다.

정조문의 큰아들 조희두의 증언

“1987년에 필자는 아버지 정조문과 둘이서 도쿄에 갔다. 관동주재의 재일 경제인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중에는 당시 동포 사회에서 금전적이나 문화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의 회장이 있었다. 그러면 미술관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대담 중에 나는 아버님이 틀림없이 금전적인 지원을 상대에게 부탁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돌연 차남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남인 정혜윤은 대학 졸업 후, 그 그룹회사에 취직해 중책을 맡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차남을 회장은 맘에 들어 했던 것이다. 도무지 금전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버지는 갑자기 왜 금전적인 부탁은 하지 않는가 하고, 조바심이 났다.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아버지는 ‘주간문춘’을 펴고 한 페이지를 뜯어 발밑에 깔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그 페이지를 보자, 쇼와천황(昭和天皇) 의 사진이 지면에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쇼와천황’의 건강 안부를 전해주는 사진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보고 웃는 그 표정에는 도쿄에서의 분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차남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보다는 본래 목적인 자금 융통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 분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저를 보고 “재일동포는 말참견은 하지만 돈은 내놓지 않아. 적은 금액이라도 이쪽에서 자금을 받아들인다면 미술관 운영에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한다. 돈에 색깔은 없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남북의 문제가 꼭 있다. 역시 사람에게 부탁할 것은 앞에서는 안돼”라고 말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멀리 장래를 내다보듯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가진 미술품은 정말 적다. 수집품이라 해도 민예품 중심이다. 일본에는 나보다 많은 미술품을 가진 동포가 있다. 내가 작은 미술관을 만든다면, 그들도 반드시 지지 않으려고 미술관을 만들 것이다. 혹시 몇 사람은 미술품을 맡아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한국 문화재는 재일동포 1세대가 많이 수집했고, 그들도 나와 같이 나이가 들었다. 10년이 지나면 일본에는 훌륭한 사립 한국미술관이 많이 생길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 이야기 뒤에는 아버지는 미술관을 ‘나 혼자 세우겠다’고 하는 결심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체 기업인을 만나는 것은 그만두었다.

여담이지만 그로부터 25년 동안 일본 전역에 있는 동포들의 한국 문화재 수집품이 공개된 적은 없다. 재일동포의 문화적 성숙도는 어느 시기나 변함이 없다.“

필자 주- 쇼와천황(昭和天皇, 1901년 4월 29 ~ 1989년 1월 7)은 일본의 124번째 천황. 본명은 히로히토(裕仁)

1700점의 문화재를 되찾은 것, 이것은 정조문 방식의 치열한 ‘독립투쟁’

개관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1월 중순 정조문은 쓰러졌다. 정조문은 병상에서도 시간을 아까워하며 장남인 정희두와 차남인 정혜윤에게 조선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였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지, 각각의 미술품 앞에서는 어떤 설명을 해야 하는지, 예를 들면 조선시대 목가구를 이야기할 때는 한반도 특유의 삼한사온(三寒四溫)에 대한 기후를 먼저 이해를 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미술관 개관준비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과 역투(力鬪)였다. 그것은 정말로 재일동포 1세대의 기백 그 자체였다.

정조문은 마치 자신이 미술관 2층에서 관람객들에게 강의하는 것처럼 두 아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개관 이후 입원하기 전까지 1개월 동안 늘 미술관 입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관람객을 마음으로 맞았다. 관람객이 한 사람일지라도 정성껏 설명을 해주었다. 그것이 정조문의 꿈이었고 이제 현실이었다. 작은 미술관이지만 그 문을 들어서면 틀림없는 ‘한반도’였던 것이다. 석인(石人)들이 문을 지키고 관람객을 맞이한다. 정원에서 시작된 전시품 하나하나는 정조문이 발품을 팔아 손에 넣은 ‘조선’ 그 자체이다.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은 것, 이것이야말로 정조문 방식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다.

1989년 2월 24일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 1세대 정조문의 장례식

정조문은 개관하고 4개월이 채 지나지않은 1989년 2월 22일 오랜동안 앓고 있던 간장병肝腸病으로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70세였다.

장례 당일은 비가 쏟아졌다. 교토 ‘죠오본렌다이지(上品蓮台寺)’에 2,000명이 넘는 남북의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이곳은 소년 정조문이 뛰어놀던 제2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다. 정조문이 다녔던 ‘라쿠시(楽只)’ 소학교가 지금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센본(千本)’거리에 늘어선 조문 행렬에는 정조문과 오래 교류하였던 벗과 지인, 재일동포 사업가, 문화 활동의 동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날 도쿄에서는 쇼와(昭和)천황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드디어 ‘쇼와(昭和)’시대의 막(幕)이 내리는 날이었다.

‘쇼와’ 시기는 제국주의 전쟁기와 전쟁 후 번영기로 구분된다. 그리고 조선의 근현대사에서는 비운의 식민지 시기와 남북 분단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쇼와’ 시대의 역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일본 전국이 무거운 공기에 휩싸인 이날, 교토 센본거리의 조문객들은 슬픔에 잠겨 눈물과 침묵 속에 고인과 작별을 고하였다. 상주였던 장남 정희두는 참배객에게 그날 이런 인사말을 했다.

“아버지는 64년 동안 재일조선인으로, 한 번도 조선의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우리 조국으로 통일될 때까지 절대 귀국도, 방문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를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대마도에, 아버지의 조국으로 향한 추억과 함께 가지고 가겠습니다”.

왜 하필 대마도였을까?

대마도는 6살 때 일본으로 건너온 정조문에게 조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큰아들 정희두는 이렇게 얘기한다. 

“대학교 2학년 봄에 김달수의 소설책 ‘쓰시마까지’를 들고 현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첫 번째 대마도 여행은 친형인 정귀문의 ‘고국을 그리는 여행’이라는 기행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는 조선해협입니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센표마키야마(千俵蒔山)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시속 30km의 선박이라면 2시간 이내에 건너편 부산에 도착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동은 팔색조와 어딘가가 닮은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우리는 태어날 때의 소리가 있어서 각각의 소리로 지저귐을 남긴다. 또한, 조국의 소리와 친척들의 지저귐도, 대마도에서는 더욱 가깝게 전해질 거라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던 것인가…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대마도의 팔색조를 불러들이기 위해 우는 소리를 녹음해서 불러들이는 이 방법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마도에 모여든 당시의 동지들도 같은 맥락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장남 정희두의 회고가 이어진다.
 
“아버지는 1972년과 1974년에 대마도를 방문하였습니다. 한번은 ‘우에다 사아끼’ 교토대 명예교수, 김달수 작가, 친형님 정귀문을 비롯하여 재일지식인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단체로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 3명이 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対馬島)의 북단에 있는 센표마키야마에 갔습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도 3명은 땅에 발을 꽉 딛고 바람에 저항하며 서 있었습니다. 김달수, 이진희, 그리고 아버지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한반도까지는 약 50km. 맑은 날에는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눈으로 한국의 섬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년 남자 3명의 얼굴은 상기되었으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작가 김달수는 그때의 모습을 소설 ‘쓰시마까지’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승용차를 탔다. 정조문은 말없이 그저 차를 몰며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조문은 급히 차를 멈추더니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정조문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정조문은 쥐어짜는 듯이 소리를 내면서 계속 울었다. 뒷자리에 있는 나와 이진희도 눈물이 맺혀 시선을 둘 때가 없어 서로 다른 쪽을 향해 밖을 바라보았다. 정조문의 머리가 유난히 더 하얗게 세어 보였다. 정조문은 드디어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정조문은 조용한 목소리로

‘김선생’하고 정색을 하며 나를 불렀다. “나라와 민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조문이 나한테 물었다. “모르지.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지금 그것 때문에 울었다는 것뿐이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왠지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디를 향해 힘껏 외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는 왜 여기까지인가!”

이것은 재일동포 3인이 대마도를 방문했던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후 1970년 후반부터 대마도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일본 거주 지식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아버지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큰 아들 정희두의 회고다. 

“아버지의 유품을 이곳에서 조선반도로 향해 띄어 보낸다”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유지(遺志)인 고려미술관을 이어받아 계승한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아버지 정조문은 일본에서 조선의 미술품 수집에 집념을 불태우면서 대마도까지 밖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고려미술관’이라는 형태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대마도에서 3명이 품은 생각은 재일동포 1세대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대마도에 가 보았지만,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재일(在日)의 역사를 배우고, 의지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삶은 재일동포 1세대가 살아온 증거입니다. 아버지는 ‘조선문화사’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김달수, 시바 료타로, 우에다 마사아끼와 함께 일본 전역을 돌면서 일본 속의 조선을 발견하는 여행에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을 가까이에 있는 대마도를 찾으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던 것입니다. 이는 많은 일본인에게 조선이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 방문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려고 하면 갈 수 있었지만,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성품이 그를 일본 땅에 머무르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 소리 없는 울음은 아버지다운 표현으로 생애에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진 마음의 외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조선의 미술관을 세우려고 하는가. 우선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조선미술 전문미술관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이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라고. 

2012년 10월에 개관 24주년을 맞아 5층 석탑 앞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미술관 안 뜨락에는 높이 6.5m의 5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베(神戶)의 부농(富農)의 밭에 뿔뿔이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한 정조문이 15년 동안 찾아다니고 설득하여 겨우 손에 넣은 것이다.

“네 아버지는 석탑을 구입하기 위해 매주 고베에 갔었다. 이전 소유주의 선대(先代)에 누군가 선박회사를 운영해서 선박 화물과 함께 한국에서 갖고 왔다고 들었다. 선대가 죽고 나서 상속문제도 있었겠지. 2,000만 엔을 주고 구입했다고 들었다.”

이 석탑은 지금 고려미술관의 상징이 되었다. 방문객은 반드시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한다.

식민지 소년이 본 ‘빛’

정조문의 유해는 교토 히에이잔(比叡山) 산기슭으로 모셨다. 정조문은 어린 시절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베틀 짜는 소리에 잠 못 이룰 때면 자주 밖에서 히에이잔을 바라보았다. 그때 소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멀리 산 중턱에서 반짝 반짝거리는 반딧불 같은 것이었다. 소년은 산에서 본 반딧불을 상상하면서 꿈을 키웠다. 환상적인 빛의 정체는 실은 히에이잔의 케이블카에서 나는 불빛이었다. 정조문은 후에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그 케이블카를 탔다. 정조문의 묘(墓)는 케블카 타는 곳 바로 옆에 있다. 가족이 성묘를 갈 때면 소년 정조문의 낭만적인 면을 떠올리며 고인을 회상하는 곳이다.

고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미술품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수리, 보수, 짜 맞추기, 유지, 관리에 돈이 많이 들고, 그 이상의 비용이 든다. 고려미술관의 유지비용은 일본 돈으로 연간 약1,000만 엔 이상이 든다. 지금은 큰 아들 정희두와 차남 정혜윤이 중심이 되어 정조문이 남긴 회사와 함께 미술관을 유지 관리하고 있다.

정조문의 장녀 정령희(鄭玲姬)의 작은 딸 이수혜(李須惠)는 한국에서 공부하여 현재 고려미술관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외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다.

고려미술관의 안내 리플렛에 정조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國際人)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여기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차분히 그 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편(下篇)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