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국가위기, 권력이라는 아편에 중독된 지식인의 사회교란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13-12-11 13:17     조회 : 4174    

100년의 국가위기, 권력이라는 아편에 중독된 지식인의 사회교란
김갑수 소설가의 ‘팩션(fact+fiction)’소설 3부작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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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평론가이자 소설가인 김갑수의 3부작 소설 중 1부 ‘압록강을 넘어서’는 작년 여름에 출간됐었고 <미디어오늘>에 이미 소개한바 있다.

“역사는 모욕이나 능욕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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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말에 출간된 2부 ‘중경의 편지’와 3부 ‘전쟁과 운명’을 읽었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한 이른바 ‘팩션(fact+fiction)’의 형식으로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서 그의 소설 장르로의 특장(特長)이 있다. 더구나 소설에서 다룬 100년 전, 70년 전, 50년 전은 여전히 ‘현재의 시간’이었다. 시대 배경은 달랐지만 2013년 ‘한국의 오늘’을 소설에서 그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란 부패기득권 세력이 끈질기게 가렴주구(苛斂誅求)하면서 한 ‘공동체의 인간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식이었고 지금 또한 그렇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이명박이 바로 그랬고, 지금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그렇다.

‘현상’과 ‘원인’

국가가 위난에 빠졌을 때마다 그 원인을 다각도로 찾을 수 있다. 최근 ‘시민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사회비평서를 낸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11월 2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하는 등 현재 돌아가는 판세가 100여 년 전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살길을 모색하려면 국력을 결집해내야 함에도 현재 한국 사회는 구한말(舊韓末) 때처럼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과 갈등 속에 허우적대며 기운을 탕진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여기까진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 맞는 얘기고 나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상’의 '원인'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눈'의 결핍이다. '현상'은 지적을 하고 있지만 '원인'에 대한 논구가 그의 책 ‘시민의 탄생’ 에서는 현저하게 부족해 보였다. 14년 전인 1999년 당시에도 거창한 21세기 ‘국가담론’을 들고 나왔고, 나는 그 책을 사서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지적은 '현상 담론'에 그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딘가 읽은 글에서 송호근 교수는 자신을 이념적으로는 '중도우파'라고 스스로 평가한다고 했다. '중도'에 또 '우파'라? 학자가 '중도'에 '우파'일 수 있는가? 객관적 사회사실의 현상과 원인을 추적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사회학자'라면, 내 상식으로는 '중도'에 '우파'일 수가 없다. 그런 식의 '중도', '우파'가 바로 지식인의 처세로 삶의 현장과 현실에는 동떨어져 있단 증거 아니던가.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을 찾고 밝히는 게 사회학자로 책을 내는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김갑수의 소설에는 이야기의 형식인 ‘소설’이지만 생생한 팩트(사실)로 한국사회 ‘현상’에 대한 ‘원인’을 뚜렷하게 소설 속에 적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바로 지식인의 통찰력 결핍과 지적 허위와 퇴폐, 사이비 지식인의 사회적 교란으로 인한 국가공동체사회의 붕괴를 유발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반민족행위로 귀착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100여년 전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 현실의 원인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 일본을 공격하기는 커녕 내부 분열만을 조장

“17세에 일본에 유학간 윤치호는 게이오 의숙 총장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김옥균을 이용했다가 버린 그 사람입니다. 윤치호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이었습니다. 매일 밤 영어로 일기를 쓴다고 하는 윤치호는 지금 이곳에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무용론을 펼치려면 뭐 하러 독립협회를 만들었는지요? 우리 국민들은 신사유람단의 조교 그룹이 만든 독립협회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저널리즘을 장악하고 있는 계몽주의자들이 조선을 개조해야 한다고 하면, 총독부가 나서 구체적 행동에 들어갑니다. 국민들은 그것을 감시할 눈을 잃게 됩니다. 계몽주의자나 총족부와 밀착돼 있는 예술가들이 조선 사회를 온통 연애지상주의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애인을 위해 죽는 것을 삶의 구원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중경의 편지’ 113페이지)

“계몽주의자들과 신문과 통속소설이 총독부와 담합하여 조선을 망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후유증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길 것입니다”(‘중경의 편지’ 116페이지)

“안창호의 강연 제목은 ‘조선민족의 장래’였다. 그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인용하면서 해박한 지식을 강약조절이 잘되는 어조로 설파했다. 처음부터 청중들은 그의 언변에 찬탄했다. 그가 민족의 출로가 무엇인지를 음성을 높여 강조할 때마다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민족적 역량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후, 이의 타개를 위해 ‘민족인격완성론’과 ‘민족경제확립론’을 내세웠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격 수양이 적은 데 이유가 있으므로 각자의 인격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수양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서로 화합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민족 경제 확립을 위해 국산품 애용과 민족 기업 육성을 강조했다. 국내에서 전개되는 물산장려운동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안창호의 강연을 들으며 김용호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졌다.그는 안창호의 말에서 조선이 후진국이라는 말까지는 동의한다하더라도 조선민족이 열등하다는 주장에는 반감이 일었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굳이 내부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당대 위정자들의 무능과 사리사욕이었지 열악한 민족성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경의 편지’ 134페이지)

사이토와 이광수

“환갑을 넘겨 고희를 바라보는 조선 총독 사이토는 법치보다 인치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법치는 효율적이긴 해도 반대 세력을 만들지만, 인치는 더딘 것 같아도 결국 일을 이루어 내는 힘이 있는 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저항 세력을 아우르는 방법으로 철저한 인치를 선택한 것이었다.

사이토는 많은 조선인을 만났다. 그는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에 대해서 기탄없이 감형을 하거나 형 집행을 정지하여 석방해 주었다. 결과 최남선과 최린은 이미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해에서 들어와 형을 면제받은 이광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오가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중경의 편지’ 121페이지)

“일본에 세 차레나 유학했던 이광수는 조선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은 계몽주의자였다.
‘우리가 사철 옷을 지어 입는 서양목, 옥양옥 등 피륙을 짜내는 후지 방직회사의 아름답고 거대한 공장이 보인다. 참 좋은 경치다. 해가 뜨니 초라한 조선의 꼬락서니가 분명히 눈에 띈다’ (이광수의 청춘 9호, 1917. 동경에서 경성까지) (‘중경의 편지’ 194페이지)

“사람들은 대체로 친일 행각이라고 하면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친일의 계기가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에서 빚어진 가혹한 탄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초부터 민족을 흠집 내고 분열을 조장한 위장 계몽주의자들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미 이광수는 1917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잡지 <학지광>에 써놓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일본은 태서(泰西)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성공하여 아세아 전체의 문화 도사(導師) 지위를 얻었고 장차는 동서 문화를 융합하여 독특한 신문회를 조성하여서 금후의 회람이 될 것이다‘

이광수는 일본은 문명의 세상, 과학의 세상, 경쟁의 세상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도로, 자동차, 철갑선, 아카시아, 울창한 산림, 관계, 수리조합, 농사개량, 육지면, 제사공장, 기계공장, 호소가와 농장, 신문, 은행, 전화, 전등, 수도, 위생조합, 공회당, 번쩍한 가옥, 후지방적회사, 근대학교 등이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조선은 쓰러져 가는 모옥, 파리, 파리가 날아드는 음식점, 불결한 도로, 발가벗은 산, 바짝 마른 개천, 초라한 사람들의 꼬락서니, 계모의 손에 자라나는 계집애, 불결하고 산란한 가옥 등이 있는 나라였다. (오도 답파 여행. 동경에서 경성까지)

총독부는 정책적으로 그가 민족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생활비를 조선총독부에서 받아쓰고 있었다.“ (‘중경의 편지’ 196페이지)

민족을 반역한 지식인들의 초상, 그러나

소설 내용 인용의 예문에서 보듯이, 김갑수 소설 2부 ‘중경의 편지’는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 1937년 중일전쟁을 시대배경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정치라는 것이 당대 대중과 지식인들을 어떻게 오염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근거 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일본과 서양을 추종했던 세력, 즉 독립협회를 비롯한 개화·계몽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는 그 험난한 시대에도 우리 것의 가치를 알고 우리의 전통을 신뢰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타개해 보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6명의 젊은이가 등장하는 제3부 ‘전쟁과 운명’ 에는 역사상 실제 인물이거나 아니면 작가에 의해 가공된 허구의 인물들이 중일전쟁, 동아시아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시대에 대응하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을까? 일본제국주의의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민족말살정책 등이 강화되면서 조선인은 민족공동체가 파괴되는 위험에 직면한다. 이에 따라 조선 지식인들은 거의 친일로 기울어진다. 과연 6명의 젊은이는 이 격동하는 역사에서 어떤 족적을 보여줄까? 소설은 민족애와 반민족 매국(賣國)이란 엄정한 잣대로 냉정하게 등장인물을 목도(目睹)하고 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역사 인식을 위하여

김갑수는 그의 페이스북에서 “역사에는 기록으로서의 역사와 시간으로서의 역사가 있다. 전자는 과거, 후자는 현재를 뜻한다. ‘기록의로서의 역사’는 ‘인식’하는 것으로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반면에 ‘시간으로서의 역사’는 ‘의식’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가리켜 역사의식이라고 부른다. 즉 오늘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의식이 곧 역사의식이다.

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해야 옳다. 현재적 의미를 띠지 않는 과거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는 과거를 근거로 하여 파악돼야 한다. 과거와 연계되지 않는 현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나 현대사학회 부류의 역사인식은 부정확하고 불공정하다. 그들은 과거를 왜곡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이 음모의 동기는 영악한 이익추구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망국의 원인을 내재적으로만 보거나, 서구와 일본을 선망하거나, 개화계몽주의를 유용하다고 여기거나, 근대화를 최고 가치로 치거나, 대한민국체제만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거나 미국의 능력을 과신하는 등의 성향을 보인다. 이승만, 박정희-(전두환, 이명박) 괄호는 필자주- 박근혜 정권에는 수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목록에는 친일, 친미, 반공, 근대화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공통점 하나만 꼽는다면 ‘파쇼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정권들은 하나같이 ‘민본’이 아닌 ‘국가지상주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이는 맞는 말로써 대부분의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반복이 아닌 반동(反動, reaction)의 역사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퇴행의 시대를 맞았다. 분명히 이 퇴행은 이승만, 박정희의 것이 반복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퇴행은 단호히 전복돼야 한다. 퇴행의 역사를 전복시키는 과업, 그것은 반동의 역사를 선택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 이승만을 망친 인물은 이기붕이라고 한다. 박정희를 망친 인물은 차지철이라고 말한다. 박근혜를 망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 김기춘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김기춘은 수구적 인물이지만 그는 세상의 이 맛 저 맛을 다 향유해 본 사람이다. 그의 관력은 의외로 다채로우며, 그는 무모한 일에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나 약삭스러운 인물이다. 이기붕과 차지철의 공통점은 우직하다는 것이다. 아는 게 적고 경험이 협소하니 지향성이 단선적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콤플렉스도 있을 것이고, 불필요한 방어본능도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인데, 나는 여기에 필적될 수 있는 인물로 남재준을 지정한다. 그렇다. 박근혜가 망한다면 남재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1950년대 이승만은 조봉암의 진보당을 먼저 죽이고 3·15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12·19 부정선거를 먼저 저지르고 진보당을 죽이려 하고 있다. 이승만은 1958년 1월, 조봉암 등 7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진보당 강령인 사회민주주의에 시비를 걸며 진보당이 내세웠던 ‘피해대중 구제’와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조봉암을 법살하고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이는 4대 민의원 선거가 목전에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의원 선거에 진보당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박기출의 기록 증언에 따르면 당시 민주당의 조병옥은 자유당의 이기붕과 ‘진보당 말살 계획’을 숙의했다고 한다. 특히 민주당 김준연은,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때의 조병옥, 김준연에 지금의 김한길, 조병태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야당인 민주당에는 장면이라는 친미 정치인이 있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장면을 ‘국제신사’라고 일컬었다. 온유한 합리주의자, 젠틀맨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조병옥보다 분명한 친일이력이 있었다. 우리가 알듯이 그는 나중에 내각수반을 하다가 5·16 쿠데타를 맞자 심야에 미국 대사관 문을 두드리다가 문이 안 열리자 성북동 수도원으로 도주, 은신한 인물이다. 그는 친미 반공에 의문을 제기하는 진보당을 멀리 했다. 장면에게 오늘의 문재인, 안철수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명산 사건 등 간첩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진보진영 내 인사들의 ‘종북 군불 피우기’가 먼저 있었다. 서상일 등은 조봉암의 ‘피해대중론’이 ‘너무 강하다’(북에 가깝다?)고 말하며 혀를 찼다. 그들은 진보당을 소외시키고는 민주혁신당을 차려 나갔다. 당시 민주혁신당의 서상일, 최익환, 고정훈, 김철(김한길 부친) 등에 정의당의 유시민, 심상정, 노회찬, 천호선 등이 겹쳐지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역사는 정녕 반복만 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역사는 4·19 학생혁명으로 반동하는 듯했다. 하지만 뭣 모르는 국민들은 젠틀맨 장면 따위에게 역사의 주도권을 맡겼다. 이것은 1955년의 민주당이 반복된 것이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당시 민주당의 친일파 숫자가 자유당 못지않게 많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는 5·16으로 다시 한 번 치욕의 반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역사의 반복은 없어야 하지 않은가. 피 흘리고 만들어 놓은 세상에 5·16 같은 재앙이 또 들이닥치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 일 아닌가? 오늘의 민주당이나 친노나 안철수 등은 집단의 성격이나 인물의 캐릭터 면에서 친일파가 득실거리던 1950년대의 친미 민주당과 영락없이 닮아 있다”

주권재민이 참살(斬殺) 당한 오늘 현실

김갑수의 소설 3부작이 관통하는 극명한 주제는 지난 100여년의 역사 경과에 이은 오늘 한국의 비참은, 민주주의의 주권재민이 참살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오늘을 살고 있는 시민대중의 각성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몰상식의 사회를 넘어 광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에서 이미 몰상식이 현실 주도권을 획득하고, 집단적 몰상식으로 몰아가면서 집단의 광기로 옮겨가고 있다. 총체적인 선거부정이 드러났음에도 전혀 부끄러움도 모르고 도리어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박근혜 정권은 박근혜 대통령 직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종복몰이’로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정권에 경고하고자 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미사에 대하여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신부들에게 “조국은 어디냐?"면서 ”중심가치가 흔들리면 국민행복도, 경제 활성화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며 협박하듯 강변한다.

이런 주장이 기실 낯설지 않음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의 계속되는 언사였기에 그렇다.

한국 근, 현대사의 처참한 참상이란 아주 거칠게 얘기한다면, '배운 놈'들이 부당한 권력과 야합하고 기생하면서 '돌아가며 해처먹은 역사'이자 곧 오늘 현재의 모습이다. 지식인입네, 언론인입네, 전문가네, 교수입네, 이네들이 국민대중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사회를 교란하고 나라를 망친다. 김갑수의 소설 3부작이

'좌우'라는 시각 자체가 상투적, 사회를 보는 시각에서는 철저한 허구

나는 현단계 한국에서의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이란 부질없는 허상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나는 안 쓴다. 정의와 반정의, 민족과 반민족, 헌법체제와 반헌법, 헌법파괴체제가 있을 뿐이다. 언론도 '정론' (正論)인가 '사론' (詐論)'인가, '언론'을 표방하는 매체이지만 '사익추구집단'인가가 중요한 구분이다.

나는 헌법체제를 파괴한 자들이 민주주의 수호에 목숨을 바친 인사들을 '반체제'라고 부른 사실이야말로 '언어착란'이라고 여긴다. 옳고 바른 가치의 판단이 아니라 가짜 프레임으로 편을 가르고, 출신지와 학교와 인맥을 따지면서 ‘조폭식’ 편 가르기가 휭행한다.

지식인과 언론인을 표방하는 이들 중에서 툭하면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서 편을 가르지만, 오늘 한국 사회의 시국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적인가? 비상식적인가? 시대에 순행하는가? 역행하는가? 올바른가? 틀렸는가? 거짓말인가? 참말인가? 옳은가? 그른가? 의 문제이면서, 가장 큰 기본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 의 여부다.

‘지식인의 사회교란’, 100년 전 구한말의 어지러움을 초래한 근인(根因)

나는 오늘 김갑수의 소설 3부작 ‘압록강을 넘어서’, ‘중경의 편지’, ‘전쟁과 운명’에서처럼 우리사회 현실에 대해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는 것이 막연한 기대나 현재 눈앞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들에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적인 ‘희망’이란 곧바로 ‘체념’으로 떨어진다.

김갑수의 소설에서도 줄곧 말하고 있듯이. 과거 한국의 역사에서 내가 확신하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노력과 작은 행동이라도 끈덕질 때 비로소 세상을 바꿀 가능성을 만들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인간의 역사는 잔인한 죽임의 역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희생과 용기와 승리의 역사였다고 나는 봤고, 또 믿는다. 따라서 나는 불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은 방법으로라도 저항을 한다면 역사의 미래는 우리 사람들을 '존중'할 것이기에, 나는 오늘 이런 현실에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자, 이젠 백성들이 눈 뜨고 여하히 깨어나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가짜지식인’들의 사회교란을 차단시키는 사회적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식인의 사회교란이야말로 100년 전 구한말의 어지러움을 초래한 근인(根因)으로 보고 있다. 내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가, 지식을 훔쳐서 못된 짓을 하며 먹고사는 지도위매(知盜爲賣), 지식을 훔쳐서 백성들에게 걱정거리를 초래하게 한다는 지도우매(知盜憂賣), 지식을 훔쳐서 세상 생물들에게 원한을 사는 일을 하는 지도원매(知盜怨賣)인 '지식인의 사회교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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