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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사회, 그리고 삶

김상수, 그가 8년만에 다시 연극의 장(場)으로 돌아왔다.

 

대담 유정아 (전 KBS 9시 뉴스진행, 영상작가)

 

3개월만에 뵙는군요. 작년에는 참 바쁘셨지요? 잠시도 쉬지 않고 또 일을 하시는 군요. 작년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사업 중에 선생님이 기획하고 연출하신 총괄행사 '월인천강지곡'이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아서 저도 좋았고 또 반가웠습니다.

작년(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총괄행사 '월인천강지곡' 프로젝트중에 '한국의 사회 문화풍경'에 유정아씨가 영상작가로 참여했고 이후 여기저기서 영상제작물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면서요?

많이는 아니고요. 최근에 i-TV(인천방송)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업을 했는데, 능력도 문제지만, 작업 시간이 많이 드니까, 영상작업을 한다는게 투입하는 시간만큼 저에게 과연 적절한 장르이고 작업 대상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작년 여름에 선생님한테서 '월인천강지곡'의 '한국의 사회 문화 풍경' 영상 작업을 권유받고 그 작업에 참여하면서 제 스스로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그런 작업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유정아씨는 시나리오라든가, 구성 또는 영상 작업에 특별한 관심을 지녀왔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지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고 할까, 또는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영상작업, 이미지 작업은 매력적이라고 봤어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 또한 영상작업, 이미지 작업의 범주에서 이야기될 수도 있다고 저는 보는데요.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장르간 다른 속성이 있겠지만요. 특히 이 연극 은 그런 이미지적인 요소가 압도한다고 저는 보았어요.

영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확장적이지요. 하지만 연극은 한정적이고 제약되는 물리적인 현장의 시간 공간이 일차적 재료이고, 그 다음에 상상력의 차원에서 제약된 시공간을 심리적 심정적인 시간 공간으로 연장해 나간다고 할까, 그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의 대사 역시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적인 확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대사의 의미나 내용, 또 그것을 전달하는 배우의 음성과 울림도 이미지의 연속이지요. 이 부분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시각적인 이미지와 상상력의 차원에서 연상되는 이미적인 요소가 서로 만나는 겁니다. 시적(詩的)이라고 하는 연극의 속성도 이미지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연극 이 이미지적이라는 의미는 상상력의 경험이 시각적 청각적이면서 연극 대사 또한 영상적인 상상력이 가능하다는 것에서 오는 것일 겁니다.

연극희곡, 영화시나리오, 글쓰기, 미술작업, 영상작업 연출등 선생님은 매체와 장르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작업을 하고 계신데 포괄적으로 얘기해서 이미지적인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겠군요. 시청각적인 모든 요소를 그 대상으로 하는 작업 말입니다.

매체나 장르의 구분으로 표현의 문제에서 억압적일 이유는 없다고 봐요.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하는가, 그 이야기의 예술적인 방법은 적절한 것인가, 그런 질문 앞에서는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고 나는 봐요. 연극이다, 영화다, 미술이다, 그런 구분이 문제가 아니고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예술적인 표현과 미학적인 세련이 더 중요한 것이지요.

93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했던 '짜장면'이라는 연극 이후 8년만에 연극 작업을 다시 시작하시는데, 연극을 자주 하지 못한 큰 이유가 있나요?

연극을 자주 못하는데는 재정적인 이유가 가장 컸지요. 연극을 만드는데 한번도 작품에만 전념해 본적이 없었어요. 항상 제작비를 만드는 문제로 고민해야 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가난한 연극'이라는 연극의 속성도 있겠지만 그런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연극을 만드는 최소한의 재정적 부담이 개인한테는 심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공공재원을 사용하는 국립극장이나 시립극단 등이 그 역할이 중요하다고 봐요. 무엇보다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하는 책임이 그들한테 우선하지요.

이 연극 은 국립극장과 선생님측에서 공동주최인데 역시 재정적인 압박을 받는가 보군요.

극장 시설 등 하드웨어는 국립극장측이 책임지고 작품제작에 드는 경비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했어요. 관객수입에서 일정비율로 나누기로 했고요. 이 작은 규모의 연극도 몇 천 만원 드는데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지요.

작품을 쓰고 연출하기에도 바쁘실텐데 재정적인 걱정을 하면 작품을 만드는데 집중력이 떨어지겠군요.

참 불운한 처지지요. 정말 단 한번만이라도 작품에만 집중해 보는 그런 처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내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작품에만 집중한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길 것까지는 없지만, 마음은 답답하지요. 이제 올해부터는 극작과 연출에만 열중하는 그런 시간도 올 것이라고 봅니다.

연극의 속성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제약적이고 한정적인 시간 공간에서 하는 것이고 가난한 속성이 연극의 특징일 수도 있겠는데, 산업적 경제적인 일정 규모로 연극을 확대시킨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무리인가요?

연극은 산업은 아니지요. 가내수공업적이고 장인적(匠人的)이며 정신적인 작업이지요. 다만 최소한의 제작 경비도 개인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에서 만들어야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연극의 공공성 같은 걸 생각한다면, 제작비용을 일정한도 사회에서 지출하는 문제가 적극적으로 안출되고 실현되어야 할겁니다.

8년 동안 연극을 안 하시고 시나리오전집 출간, 미술 전시, 문화 기획 등의 일을 주로 많이 하셨는데 그런 작업들과 연극 만들기는 어떤 상관성이 있나요?

연극 만들기는 내가 하는 어떤 장르의 일보다 힘이 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힘든 것의 대부분은 조금 전에 말 한대로 제작비 마련입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선생이 내가 오랫동안 연극을 안하고, 못하고, 중단한 이유를 나를 소개하는 글에서 재미있게 표현했더군요. "인연과 학연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불러주는 직장도 없이, 혼자서 연극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사회에서 연극의 길은 냉담한 망각 속으로 매장되는 길이고 광막한 벌판의 저 끝을 향해 점점이 소실되는 길이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연극을 하기 위한 사회적 여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다"(김상수 사회문화비평집 '착한사람들의 분노' 필자소개의 글 중에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문학평론가의 지적은 옳습니다. 내가 우리 사회에서 연극작업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막막한 현실에 가위 눌리는 처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렇다하고 연극에 대한 인식조차 연극 대내외적으로 연극이 전혀 자기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0대 후반에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연극 환경이나 풍토가 철저하게 식민지적인 지경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서양 연극을 흉내내고 남의 나라 작가 작품을 허락도 없이 그냥 조악한 번역으로 무대에 올리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줄곧 창작극을 했습니다. 창작이 없는 모방의 풍토에서 연극을 하고 서로가 자리 매김을 한다는 것이 내 눈에는 한없이 유치하고 한심하게 여겨진 겁니다. 먼저 나는 연극을 철저한 창작의 작업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한 겁니다. 셰익스피어도 피터한트케도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내가 살고있는 역사가 중요한 대상이었고 희곡, 음악, 소리, 심지어는 포스터 한 장까지도 철저한 창작의 정신을 함유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줄곧 지녀 왔습니다. 그러니 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제작비 마련 때문에 몇 년에 한편씩 무대에 올리는 악전고투였지요. 문예회관 등의 공공 시설 사용 신청을 내면 기득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문예진흥원에 진흥기금은 꼬박꼬박 냈지만 그런 기금은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고. 후회는 없지만 젊은 청춘을 너무 소모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보다 다른 사회적 일에 그 많은 노력을 바쳤다면 보다 뜻이 넓은 효과적인 일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지성의 풍토, 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풍토가 연극계에는 없다는 겁니다. 연극작업이 지적인식의 체계와 그 대상일 수 있는 작업이 아니고 창작 정신을 존중하는 환경이 아직도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한국 연극사부터 다시 정리해야 할겁니다. 식민지 시대의 연극사 정리도 물론이지만 곡필하고 훼절하는 비평가 들이 연극지식인으로 둔갑되어 연극을 재단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잡혀져야 합니다. 물론 연극계를 의식하고 연극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후배도 생각하고 연극환경의 개선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선생님은 '연극은 정신과 눈이다'라는 표현을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셨는데, 이제 그 말뜻을 명확하게 알겠군요. 사실은 예술일반이 시대의 정신과 눈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연극은 정신과 눈이다'라는 표현을 처음 쓴 때가 83년 드라마센터에서 '191931'이라는 연극을 할 때부터입니다. 그 연극은 역사에서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질문하는, 우리 현대사에 관한 물음이었습니다.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연극의 사회적 역할이나 연극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연극은 마땅히 우리들 삶의 현재를 질문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술의 시대정신을 어떤 타 예술장르보다 더 날카롭게 포함할 수밖에 없는 연극의 속성은 그런 표현을 가능하게 한 겁니다. 이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구요.

8년만에 하시는 연극작업인데 92년에 공연 된 이 작품 을 다시 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은 호흡이 아주 긴 대사 위주의 연극입니다. 시간 공간이 빡빡하고 촘촘하며 표현은 압축되어야 하고 긴장이 연극 전편에 팽팽합니다. 나는 요즘 우리 사회의 언어가 무너지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훼손되어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어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연극의 대사는 시적(詩的)인 압축적 표현의 언어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연극을 하면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연극의 제의성(祭儀性)을 일깨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연극이 우리사회에서 오락의 측면이나 여흥의 심심풀이 정도로만 하찮게 취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현실에서 연극 고유의 장르적인 특성과 연극만이 지니고 표현할 수 있는 그 특유의 것들이 보편화되고 있지 못한것을 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구분이 될 수밖에 없는 연극적 속성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현장의 시간 공간을 정신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에 연극이 있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진지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가벼움과 까불거림이 세태의 양식을 넘어서서 존재의 방식인양 넘치고 있습니다. 빠르고 급하고 시끄럽고 플라스틱이나 비닐봉지같이 삶이 함부로 취급되고 있고 또 함부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본질을, 깊이를, 연극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기도 합니다. 우리가 연극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며 또 생을 배우는 것이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관객이 이 연극 을 본다는 것은 우리들과 같이 우리들 삶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며 우리들 인생을 좀더 개선시켜 보자는 태도입니다. 빠르고 경쾌하며 재미있는 것들로 주변에 넘쳐납니다. 상업적인 오락은 차고 넘칩니다. 이제 나는 진지하고 깨끗하고 정적(靜的)인 정적(靜寂)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예술다운 예술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사유의 열정이 필요한 때이고 영적(靈的)인 가치를 찾아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이고 은 이것을 말해 줍니다.

아주 포괄적인 얘기지만 진지하고 또 중요한 생각으로 들립니다. 이 연극 의 작품주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죽습니다. 역설이지만 매일 매일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요? 풍문으로 삶을 살고, 착각으로 행동하고, 떠밀려서 이해하고, 신문과 텔레비전으로만 세상을 판단하고 산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 비좁고 얕아 집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 인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섬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정체를 질문합니다. 나와 타인들, 개체와 집단의 문제, 인간의 상투적이고 억압적인 제도와 진정성이 없는 사람들의 관습이 얼마나 삶의 양식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가 얼마나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가, 그것과 비교하여 자연의 외경(畏敬), 생명과 존재의 물음을 질문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작년에 예술감독을 한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총괄행사 '월인천강지곡'에서도 그렇고 이 연극 에서도 그렇습니다마는'시간, 생명, 공동체'를 중요한 예술의 주제로 의식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주제는 거의 일관됩니다. 심지어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다만 표현 양식과 장르의 표현에서 그 새로움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간과 생명,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상생(相生)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또 같이 발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인간의 진실을 일깨우는 노력이 예술의 작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은 인간상황의 깊은 곳을 천착하는 것입니다. 정치보다 훨씬 더 정신적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사회문화예술비평집'착한 사람들의 분노'(생각의 나무 간행)를 보니까, 책 내용 중에 '마음의 생태'라는 장에서 사람은'이제 다시 인간의 영혼으로, 사람의 마음으로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생각이나 사고, 관념이나 정신 등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일련의 현상을 마음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마음에는 생각의 체계들이 세상과 전존재적으로 얽혀있고 연결되며 삼투되고 있는 상태를'마음의 생태'라고 다시 표현해 봅시다. 마음의 생태는 지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마음과 내부적인 마음을 분리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정신과 물질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재적이며 복잡하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세계로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마음의 태도에서부터 생명가치는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관념 또는 마음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영원히 살 것으로 생각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통찰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욕심도 여기서 출발하고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못 인식하면 인간의 정신은 위축되고 쪼그라들지만,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포착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인간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노력하면서 인간의 창조성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정신의 창조적 잠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마음의 생태가 지향하는 가치는 한마디로 인간과 자연의 하모니입니다. 이 연극 의 주제도 이것에 바쳐져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엄청난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중대한 오류와 결함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듯이, 만일 우리의 문명에서 생태적인 균형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경제 체제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우리가 처한 반인간, 반자연 반생태의 문제들을 본질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지만 인간의 역사는 생태적이라고 할만큼 인간의 지각을 거듭 깨어나게 하여 일어설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도 합니다.

예술이, 또는 연극이, 삶에 반성이나 자극을 준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힘들고 외로운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것의 영향력이나 파급되는 넓이에는 한정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부터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연극이 우리들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계시는 것과 실재의 영향력은 다른 차원이 아닐까요?

그것도 인정합니다. 우리사회, 아니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만연된 불신과 미증유의 무기력, 뒤집어서 충동적이고 발작적인 태도, 딱히 말할 수 없는 적대감, 잡민적(雜民的)인, 아까 얘기한 비닐봉지같이 삶을 취급하고 있는 태도 등에는 그 연원이 있습니다. 삶의 근본을, 근원을 질문하는 태도가 아주 희소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사회적 붕괴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연극은 절실하게 그 역할과 기능이 새삼 뚜렷합니다. 연극이야말로 직접 대면(對面)하여 우리들 인생에 말을 걸게 합니다. 문명이 발전하여 인터넷이니 멀티미디어니 하는 대화의 방식이 있겠지만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직접 대면하는 연극은 인간에 영원하리라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좋은 연극의 경우입니다.

생명 의식이랄까, 공동체 의식, 또는 자연에 대한 외경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생각의 계기는 언제부터 있었나요?

글쎄요. 아마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이 생각나는군요. 박정희 때인데 국가발전 경제발전 포스터를 그려야 한다고 하면서 포스터 그리기를 했잖아요. 공장을 그리고 굴뚝에다가 검은 연기가 나는 것을 그리고는 했잖아요? 경제발전이라고. 난 그때 거북했어요. 이런 건 아니다. 어려서 막연했지만 몸이 마음이 따라 가 주지를 않았던 기억이 나요. 저 파란 하늘에 시꺼먼 연기를 그린다는 것은 역겹고 부자연스러워 했던 생각이 나는군요. 그래서 미술 시간이 지겨웠고.

작품연보와 김상수 희곡집을 보면, 1978년, 지금부터 이십 삼년 전, 첫 연극작품 환(環)에서도 이 연극 과 비슷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78년이면 만 열 아홉 때 군요. 그러나 열 아홉 때나 마흔 세 살이 된 지금이나 나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하신 것이 없다는 것은 나쁜 것인가요? 좋은 것인가요?

아주 나쁜 겁니다.(웃음)

연극 연습을 할 때 배우나 스탭들에게 아주 엄격하고 혹독하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은 과장이고요. 다만 제사(祭祀)를 지낼 때나 예불(禮佛) 또는 미사(MASSA)에 참여할 때, 옷에 먼지를 털고 단정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은 기본이 아닐까요.

그 말은 과장이고요. 다만 제사(祭祀)를 지낼 때나 예불(禮佛) 또는 미사(MASSA)에 참여할 때, 옷에 먼지를 털고 단정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은 기본이 아닐까요.

연기자들 캐스팅은 어떤 방식을 택하셨나요?

이미지와 에너지를 봅니다. 활력이나 열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을 봅니다. 텔레비전이나 인기등의 외부적인 동기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일상을 살면서 마음과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져 보겠다는 의지를 보는 겁니다.

연기자를 결정하는 원칙이 있나요?

예의를 봅니다.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우선으로 합니다. 연극은 만남의 작업이고 타인과의 만남에서는 예의가 중요합니다.

관객들이 이 연극을 통해서 무엇을 얻기를 희망하나요?

연극을 보기 위해서 국립극장 소극장에 들어오면 잠시 교회나 성당에 온 것같기도 하고. 어디 깊은 절간에 온 것 같기도 하고. 합장(合掌)하고 기도(祈禱)하는 마음이 관객들 스스로 들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산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마음 말입니다.

www.kimsangsoo. com 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드셨더군요.

후배가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하나의 커뮤니티가 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연극은 이제 자주 계속해서 하실거죠?

정말 많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게 계속할 수 있는가를, 또 어떻게 관객과 만날 것인가를.

 

2001년 1월 19일 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