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Serge Latouche의 문서 1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8-01-26 05:41     조회 : 23584    

자전거를 타고 나가 문서를 읽었다. 카페에서 풀밭에서 글을 읽었다. 한국에서 읽었던 문서지만 이곳에서 다시 읽으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세르게 라투세(Serge Latouche)가 쓴 이 문서는  ― 프랑스 경제학자. 남(南) 파리 대학 명예교수. 저서로《무한정의:세계화된 경제 속에서의 윤리의 도전》(파리, 2003년),《개발을 넘어서:경제의 탈식민화에서 대안사회의 건설로》(파리, 2004년)
여기 2회에 걸쳐 소개하는 문서는 프랑스 시사교양지《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연속적으로 실렸던 두편의 에세이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작년에 지도적인 기상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환경문제를 진보적으로 푸는 데는 경제성장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청정기술에 투자하기 위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은 해결책이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익의 입장만이 아니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좌익도 공유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도 성장을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보다 공평한 부의 분배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파브리스 니콜리노는 환경전문 기자인데, 그는 최근에 자신이 근무하던 파리의 주간지《폴리티스》(반세계화 운동 편에 서있는 언론)에서 지금 프랑스 정치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어있는 연금개혁에 관해 내부논쟁 끝에 사임을 하였다. 그 논쟁의 경과를 보면 좌익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드러난다.

한 독자가 말했듯이, 그 분쟁은 니콜리노가 “거의 모든 프랑스 정치계급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통교리, 즉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보다 많은 성장, 보다 높은 생산성, 보다 큰 구매력과 소비라고 하는 생각을 감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수십년에 걸친 광란적인 낭비 끝에 지금 세계는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기후가 갈수록 불안정해짐에 따라, 우리는 석유 때문에 전쟁을 하고 있다. 물 전쟁이 뒤따를 것임에 틀림없고, 그와 동시에 예견되는 생물유전자상의 재앙을 통해서 필수적인 식물과 동물 종들이 소멸하고, 전염병들이 만연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확장하는 성장사회는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축소된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급적 조용하게, 그리고 공생공락(共生共樂)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제규모를 줄일 것인가를 긴급히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성장사회는 성장경제에 의해 지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장경제에 강박적으로 붙들려 있다. 그것은 ‘성장을 위한 성장’을, 삶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삶의 본질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생물권의 한계를 넘어서 가고자 하기 때문에 지속불가능하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환경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각 개인의 소비량이 지구표면을 얼마만큼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계산해볼 때, 자연자원에 대한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와 그 자원의 재생 능력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생활방식이라는 게 드러난다. 

미국 사람은 평균적으로 일인당 9.6헥타르, 캐나다 사람은 7.2헥타르, 그리고 유럽 사람은 4.5헥타르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지금 평등한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평등이 유지되면서, 지속가능한 세계가 되자면 그때의 소비수준은 일인당 1.4헥타르 미만이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인구증가를 고려하지 않을 때 그러할 것이다. 

성장과 환경이라는 모순적인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자기들이 하나의 마술적 공식―‘생태효율성’―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한다. 생태효율성은 지금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논리의 중심개념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자연자원 소비의 강도를 줄여나가서 그 결과 지구의 최대수용능력과 양립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한다는 생각이다.
생태효율성이라는 면에서 그동안 여러 진보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 극단적인 성장에 수반되어왔고, 그 때문에 환경에 대한 충격은 실제로 더 악화되어왔다. 효율성에 있어서 개선된 개개 품목이 환경에 대해 미치는 충격의 감소분은 더 많은 상품이 시장에 나옴으로써 상쇄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리바운드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가 상대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거나 어떻든 덜 물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낡은 경제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고 있다. 모든 지표는 우리의 자원소비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장차 과학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고, 자연은 끊임없이 인공적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려면 정통 자유시장 논리에 대한 완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경제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사회의 계획된 종언은 반드시 음울한 것일 필요가 없다. 이반 일리치는 언젠가, 우리가 현재와 같은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것의 부정적인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마치 맛있는 요리의 즐거움이냐 그 위험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요리 자체가 내재적으로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그것 없이 지낼 때 우리는 좀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과는 다르게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장사회에서는 불평등과 불의가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이다. 성장사회가 낳는 안락한 삶은 흔히 환상에 불과하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사회는 즐겁지도, 쾌적하지도 않다. 그것은 스스로의 부에 병들어 있는 반사회이다.북아메리카와 스칸디나비아 유럽 등 ‘북(北)’ 쪽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소비재와 서비스에 보다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러한 물건과 서비스에 포함된 비용을 잊고 있다.

오염된 공기와 물 그리고 환경의 열악화로 인해서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대적 삶을 위한 비용(의료, 교통)은 증가되는데, 거기에는 점점 희소해져가는 자원(물, 에너지, 열려진 공간)의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허만 데일리는 진정한 진보를 알려주는 척도를 고안한 바 있다. 그 척도는 한 나라의 국민총생산을 오염과 환경 열악화로 인한 손실에 따라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척도에 의해 계산할 때 미국에서는 GDP가 계속해서 증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진보는커녕 정체와 쇠퇴가 기록되어왔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잘 나가는 경제, 선진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출구도 없이 벼랑을 향하여 빠르게 돌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축소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탈개발 사회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고,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대안적 세계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것을 미덕으로 만들면서, 경제의 축소가 ‘북’쪽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을 줄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축소’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저 분별없는 성장을 위한 성장이라는 교의(敎義)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축소는 마이너스 성장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것은 모순적인 말이다. 그것은 뒤로 진보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어로 비성장(decroissance)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영어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영어에서 위축(shrinkage), 감소(decrease), 축소(reduction)와 같은 말은 프랑스어 비성장(decroissance)과는 달리 부정적인 내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유시장 경제학이 지금 세계를 얼마나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성장률의 둔화에 의해서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큰 혼란으로 빠져드는지를 보아왔다. 그것은 실업을 초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적 조건의 유지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적 프로그램들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성장률이 실제로 마이너스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에 기반한 사회에서 일이 없는 것처럼, 성장사회에서 성장이 없는 것보다 더 가혹한 사태가 없을 것이다.

주류 좌익 그룹은 자신의 가장 뿌리깊은 믿음에 대한 근원적인 재검토 없이는 이러한 사고에 계속 갇혀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모축소는 비성장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데, 비성장 사회라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정의해보도록 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아무런 만족감도 주지 않는 활동들이 주는 환경적 충격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데서부터 정책이 출발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영역이 규모축소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사람과 상품이 지구 전역을 가로질러 저토록 많이 움직일 필요가 있는지 재검토하고, 우리의 경제를 다시금 지역 중심적인 것이 되게 함으로써 장거리 운송이 초래하는 오염과 기타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침범하고 부식시키는 저토록 많은 광고가 과연 필요한지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또 일회용 물품들이 대량생산 기계를 살찌우는 용도 외에 정말로 일회용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경제규모의 축소는 반드시 좋은 삶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1848년에 칼 맑스가 사회혁명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가 될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다고 믿었다. 면직물과 생산품들의 놀라운 과잉생산은 적어도 서구세계의 모든 인구가 먹고, 입고, 주거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의 물질적 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플라스틱도, 컴퓨터도, 생명공학도, 살충제도, 화학비료도, 핵에너지도 그 당시엔 없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유례없는 사회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의 인간욕구는 소박하였고, 인간행복은, 혹은 적어도 행복의 물질적 기초는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규모가 축소된 사회를 상상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제’를 넘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경제가 이론에서든 실제에서든 우리의 삶 전체, 특히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든 일자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작업시간을 대폭 축소하는 일일 것이다.

1981년에 벌써, ‘축소’를 제안한 최초의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자크 엘루는 어느 누구도 하루 두 시간 이상 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주, 이는 좀 심했다. 나는 하루에 여섯시간은 삶을 위해서 노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다른 출발점은 1992년 리우에서 열린 유엔지구정상회의에서 마련된 소비와 생활방식에 대한 협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협약은 6개항의 ‘R’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재평가(reevaluation), 재조정(restructuring), 재분배(redistribution), 축소(reduction), 재사용(reuse), 그리고 재활용(recycling). 이러한 목표는 협력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선순환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리스트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재교육(reeduation), 방향재조정(reconversion), 재정의(redefinition), 리모델링(remodelling), 재고(rethinking), 그리고 재지역화(relocating).

문제는 이기심을 포함하여 현재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 노동윤리와 경쟁심리 등이 성장 시스템으로부터 나왔고, 또 그것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더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윤리적 선택은 이 추세에 영향을 미치고, 이 시스템의 심리적 기초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변화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결집된 힘에 의한 근원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안이 하나의 허황한 유토피아적인 아이디어로 무시될 것인가? 폭력적인 혁명 없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심리적 혁명이 난폭한 사회적 소요 없이 성취될 수 있는가?

환경 훼손을 극적으로 줄인다는 것은 물질적 재화상의 금전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비물질적 제품을 통해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 제품은 부분적으로 시장적 요소를 유지할 수 있다. 시장과 이윤이 여전히 인센티브로 작용하겠지만, 이미 시스템은 더이상 시장과 이윤의 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위한 진보적인 조치들과 단계들을 우리는 지금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로 인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순순하게 따라올 것인지, 혹은 심지어 현재의 시스템의 희생자들―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스템에 의해 중독된―이 시스템의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지 어떨지 말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금년 여름 유럽을 휩쓴 열파(熱波)는 어떤 논리보다도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는 데 더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3년 12월호)


p.s - 어제는 이곳에서 알게 된 일본인 젊은 여성이 친구를 데리고 저녁에 찾아왔다. 컨디션이 좋지않아 다음으로 미룰까하다가 그냥 오라고 했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식기를 세척한 후 한 여성이 그릇을 닦는데 종이타월을 무더기로 뜯어 식기를 닦아, 내가 벌컥 화를 냈다. 때때로 어디에 사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나는 낭비하는 모습을 싫어한다. 종이 한 장은 나무 한그루에 맞먹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내가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면 살수록 점점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