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에 대하여 - Serge Latouche의 문서 2
  글쓴이 : 김상수     날짜 : 08-01-27 02:28     조회 : 23398    

이 도시 christchurch는 평평한 해안도 있지만 산을 끼고 바다가 있다. 마치 한국의 남해안처럼 들고 나고 삐잉 둘러 산을 감싸고 바다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한국의 남해안의 토양이 적당히 부드럽고 단단하여 소나무등 사철나무가 다양한 편이라면 이곳 christchurch 산은  딱딱한 바위산이 대종이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민둥산같은 모습이다.

산을 넘어 구비구비 음푹하게 바다가 있는데 놀랄만큼 아늑하고 조용한 작은 마을 앞에 바닷가를 갔다. 물이 막 빠지기 시작하고 바다로 난 긴 나뭇길이 먼 세상을 산책나가는 방죽처럼 고요하게 뻗어있었다. 200년전 대양을 건넌 사람들이 이쪽 해안 가까이 배를 대고 이 땅을 디뎠단다.

세르게 라투세(Serge Latouche) 의 글을 마저 올린다. 

오늘날 미디어는 너무나 깊이 광고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면―물질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무조건 팔아먹을 만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것 팔아먹기 전략에서 열쇠말은 ‘개념’이다.

그래서, 비성장(decroissance)에 대한 토론이 확산됨에 따라 미디어는 당연히 그 개념이 무엇인가, 라고 묻기 시작하였다. 미디어를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비성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경제학의 성장이론에 대응할 만한 축소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성장은 단지 성장이론에 대한 래디칼한 비판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용어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탈개발/발전 정치를 위한 대안적인 프로젝트를 제안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정통경제학의 틀에서 모두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비성장은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의 열쇠말이다. 사회는 그동안 진보주의적 성장경제학에 의해 지배된 사고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러한 경제학의 전제(專制)적 지배는 이 틀 바깥에서의 창조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왔다. ‘축소’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라는 아이디어는 대안적 삶에 관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 아이디어를 제창하는 사람들을 현존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경제가 축소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고 그들이 저개발 사회들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무지나 자기기만의 소산이다.

축소경제의 제창자들은 ‘북’이나 ‘남’이나 어느 곳에서든 통합적이고, 자기충족적이며,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비성장(degrowth)이라는 말보다도 무성장(non-growth)이라는 말을 쓰면 더욱 정확하고, 아마도 더 충격적으로 될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무신론(a-theism)’에서처럼 ‘무성장주의(a-growthism)’에 관해 말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경제적 정통교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체계, 즉 종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개발/발전(development)이라는 문제를 치열하게 능동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다. ‘개발/발전’이라는 용어는 너무나 많이 재정의되어왔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마술적인 개념에 대해 여전히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다. 성장을 궁극적인 선(善)으로 여기고 있는 ‘경제주의’라는 교의는 참으로 목숨이 질긴 것 같다.

심지어 반세계화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도 역설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그들은 성장의 해악을 잘 인식하면서도 계속해서 성장을 통해서 ‘남’쪽 국가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북’쪽에 관해서는 그들은 잘해보아야 기껏 성장의 ‘둔화’를 제창할 수 있을 뿐이다.

점점 더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은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성장이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속불가능하고 또 유해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성장을 별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개발의 기회가 박탈되어온 ‘남’쪽 세계에서는, 비록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 동안에는 성장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성장도 축소도 적합하지 않는 딜레마적 상황이다. 그리하여 논쟁 끝에 성장의 둔화라는 타협안이 제시되지만, 이 타협은 비성장의 의미에 대한 논쟁 쌍방의 오해를 근거로 한다.

우리의 경제를 좀더 느리게 성장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끊임없는 성장에서 해방된 사회(즉,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고, 충분히 통합되고 자기충족적인)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결코 주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그것은 급속하고 불평등적이며, 환경적으로 재앙을 일으키는 팽창경제가 주는 한가지 부인하기 어려운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비성장 사회의 창조가 ‘북’과 ‘남’ 어느 곳에서든 왜 반드시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아이디어의 역사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자기충족적이고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에 대한 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개발/발전에 대한 오랜 비판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40년도 넘게 한 국제적 논평가 그룹은 ‘남’쪽 국가들에 있어서의 경제개발을 분석해왔고, 그것이 끼친 해악을 규탄해왔다.
이들 논평가들은 단지 최근의 자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발/발전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참여주의적이며, 자립적이고, 민중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부메디엔느의 알제리아와 니에레르의 탄자니아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개발은 종종 인도주의적 비정부기관들에 의해 수행되거나 그 기관들의 지원을 받아왔다는 점도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몇몇 산발적인 성공담을 제외하고는 개발/발전은 압도적인 실패담이었다.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시작된 개발은 오직 부패와 혼란과 구조조정 계획을 낳았을 뿐이고, 그 결과 전통적인 가난은 비참으로 대체되었다.

‘남’쪽 사회들이 성장경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려면 비성장은 ‘북’쪽에 대해서만큼 ‘남’쪽에 대해서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남’쪽 사회는 개발이 아니라 이탈, 즉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이상화된 형태의 비공식 경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쪽이 어떤 형태건 경제적 축소를 채택하지 않는 한 ‘남’쪽에 있어서의 변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북’쪽 사회의 애완용 동물 먹이를 수출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우리가 먹는 고기가 파괴된 아마존 우림에서 기른 콩을 사료로 사육된 동물의 것에서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과잉 소비는 ‘남’쪽 세계에 있어서의 진정한 자기충족성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이 비성장 사회를 창조해내고자 시도하려면 그 사회는 재고하고, 재지역화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쪽 국가들은 ‘북’쪽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뚜렷한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역사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회들의 문화적 역사는 그 사회에 내재적으로 반(反)경제주의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가치들이 그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져왔던 물건들, 전통적인 공예와 기술들과 함께 부활되어야 한다.

‘남’쪽 사회에서 성장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성장을 강조하는 것은 오직 더한층의 서구화를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개발에 대한 제안들은 흔히 진정한 선의로부터 나온다. 즉, 학교와 병원을 세워주고, 물 공급체계를 만들어 주고, 식량 자급을 실현하도록 돕겠다는 선의 말이다.
그러나 그 제안들은 모두 개발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와 결부된 인종 중심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남’쪽 정부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혹은 미디어에 현혹된 대중들의 여론을 조사해보라. 그들은 서구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자들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교나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어컨과 휴대전화와 냉장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동차(폭스바겐과 GM은 지금 중국에서 연간 300만대를 생산할 계획을 하고 있고, 퓨조 역시 거기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를 원한다.

이들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또한 원자력발전소, 전투기, 그리고 탱크를 그 리스트에 추가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알랭 그라스가 인용하고 있는 과테말라 지도자의 다음과 같은 분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제발 혼자 내버려두고, 개발 운운하는 이야기는 당장 중지하라!” 인도의 반다나 시바로부터 세네갈의 에마뉴엘 엔디온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중운동 지도자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개발 주창자들은 식량의 자기충족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에 대해 건방진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회복―자체가 자기충족성은 한때 실현되고 있었으나 그동안 잃어버려진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개발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치기 시작하던 1960년대까지 자기충족적이었다. 제국주의와 성장경제, 그리고 세계화가 그 자기충족성을 파괴하고, 아프리카 사회를 보다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과거에 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물은 산업폐기물이 물을 오염시키기 전까지 마실 만한 물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정말로 좋은 교육과 건강을 성취하고 유지하는 올바른 방법일까? 위대한 논쟁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이반 일리치(1926-2002)는 학교와 병원의 효력에 대해―심지어 ‘북’에 있어서도―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란의 경제학자 마지드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우리가 원조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빈곤을 생산하는 구조를 강화할 뿐이다. 실질적인 자산을 잃어버리고, 세계화된 생산 시스템 바깥에서 자기들에게 더 적합한 대안적인 삶의 길을 찾는 희생자들에게 그 원조금이 도달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옛날의 방식으로 단순히 되돌아갈 수 있는 전망은 없다. 마찬가지로 축소나 비성장에 관한 하나의 보편적인 모델이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발이 오직 빈곤과 배제를 의미할 뿐인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전통과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근대가 약하게 뒤섞인 어떤 것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그들이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성취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일단 인간의 창조성과 재간이 경제주의와 개발 광기의 속박에서 풀려나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직면한 과제에 훌륭히 맞설 수 있으리라고 우리가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각 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전을 갖고 있다.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이븐 칼둔(1332-1406)이 사용한 ‘베움란’(번창 혹은 꽃핌), 간디의 ‘스와데시-사르보다야’(자급 혹은 행복), 서부 아프리카 투쿨레르의 언어로 ‘밤타레’(나눔에 의한 행복), 혹은 이티오피아 보라나 사람들의 어휘로 ‘피드나/가비나’(배불리 먹고 근심걱정 없는 사람의 빛나는 모습) 등이 될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개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파괴를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는 새롭고 독창적인 대안들은 성공적인 탈개발 사회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북’이든 ‘남’이든 집단적이고 포괄적인 해독(解毒) 프로그램 없이는 그들의 성장에 대한 중독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교의는 질병이나 마약과 같다.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은 처녀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두개의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에이즈처럼 작동했고, 다른 하나는 마약 상인처럼 행동했다.

성장경제학은 에이즈처럼 사회적 질환에 대한 사회의 면역체계를 파괴한다.

또한, 성장은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의 끊임없는 공급을 필요로 한 나머지, 그것은 마약 상인처럼 고의적으로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욕구와 의존심리를 만들어낸다.

공급 체인에 있어서 이 상인들이 주로 초국적기업들이며, 이들이 우리의 중독상태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의 극복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갈수록 증가하는 소비는 지속가능한 게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4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