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너무나 어지럽다.
새로 대통령으로 뽑힌 이명박이란 자가 취임하자마자 나라를 3개월 만에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시청 앞으로 나가서 이 정권에 반대하는 촛불을 시민들과 같이 들어야하는데...
벗인 조헌주 도반(道伴)의 안내로 전남 ‘강진’으로 내려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자취를 잠시 따라 나섰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진주목사를 지낸 丁載遠(정재원)(1730∼1792)과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다.
다산은 젊은 나이에 학문이 뛰어나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마흔 살 되던 해인 1801년(순조 원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천주교학인 서학(西學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둘째 형인 약전(若銓)과 함께 각각 유배되었다. 이때 다산은 경북 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19일 만에 풀려나는데 곧이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또다시 투옥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다시 강진으로 유배된 것이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 때 처음 거처는 동문외(東門外) 주막(酒家)였으며 그는 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齊)란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4년 간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단정해야 하고’
‘언어는 마땅히 정중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정했다.
이곳에서 다산은 주위 사람들의 청으로 1803년(순조 3)에 아학편(兒學編)을 완성하여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보살펴 주며 따르던 이 지방의 어린 자제들을 제자로 삼아 학(學)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207년 전, 주막에 뜰에는 다산이 마셨던 우물의 샘은 마르지 않았고 그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다 본 바깥 풍경도 그대로인 듯하다. 그 무엇보다도 나라의 어지러움이 예나 지금이나 판에 박은 듯 그대로 인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조선의 민중은 토탄(塗炭)에 빠졌고 법(法)과 령(令)은 혼돈이었다.
오늘 날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처럼 200년 전 조선시대 때도 권력과 돈이 세상살이의 기준이었으니 민생은 가히 지옥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머릿수로 세금을 매기는 당시 현실을 피하고자 자신의 성기(男根)를 잘라 아예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한 남편, 그 남편을 서러워하며 통곡하는 아낙을 보고 지었다는 시 애절양(哀絶陽)을 당시 다산은 다 남겼겠는가.
애절양이란 양(陽), 즉 남성의 성기를 스스로 자른 것을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丁若鏞, 哀絶陽
갈밭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처절코나 蘆田少婦哭聲長
관문(官門) 향해 울부짖다가 하늘 보며 통곡하네 哭向縣門號穹蒼
전쟁 나가 못 돌아오는 일이야 있을 법도 하지만 夫征不復尙可有
그걸 자른 남자 이야긴 옛날에도 못들었어 自古未聞男絶陽
벌써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안 마른 어린 자식을 舅喪已縞兒未澡
황소같은 장정이라고 삼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네 三代名簽在軍保
이장 놈 호통 치며 소마저 끌어가는데 里正咆哮牛去皁閽
달려가 하소연해도 버티고만 서있는 저 문지기 薄言往愬虎守閽
칼 갈아 들어가선 피바다가 웬 말이요 磨刀入房血滿席
이 놈 땜에 아이 생겨 이 고생 치른다고 自恨生兒遭窘厄
궁형(宮刑) 당한 환관(宦官)들이야 무슨 죄가 있더냐 蠶室淫刑豈有辜
민(閩) 땅 사람 자식 거세도 기차는 풍습이지 閩囝去勢良亦慽
종자를 퍼치는 건 하늘이 낸 이치이니 生生之理天所予
음양이 부딪치면 아들 딸 낳게 마련 乾道成男坤道女
말, 돼지 불알까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인데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사람이리요, 후손도 이어가야지 況乃生民思繼序
한 평생 잘난이는 풍악이나 즐기면서 豪家終歲奏管絃
한 톨 쌀, 한 치 베도 바치는 일 없다네 粒米寸帛無所捐
다 같은 백성들인데 왜 이렇게 다릅니까 均吾赤子何厚薄
시구편만 객창에 앉아서 거듭 읊조리노라 客窓重誦鳲鳩篇
동서고금의 시사상(詩史上)에 이런 희한한 시(詩)도 있나?
다산은 이 시작(詩作)의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은 가경(嘉慶) 계해년(순조3-1803) 가을에 내가 강진(康津)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어떤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적(軍籍)에 오르게 되어 이장(里正)이 군포(軍布)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가버렸다. 그 백성은,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른다’ 하고는 칼을 갈아 가지고 자기 양경(陽莖-남자 생식기)을 잘라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듣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들고는, 관청을 찾아가서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했으나, 문지기는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고 한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고 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이즈음 피폐(疲弊)한 마을의 가난한 집에는 아기를 낳기가 무섭게 홍첩(紅帖)이 벌써 와 있다. 음양의 이치는 하늘이 낸 것이니 교접(交接)하지 않을 수 없고, 교접하면 낳게 되어 있는데, 낳기만 하면 반드시 병적(兵籍)에 올려서 이 땅의 부모(父母)된 자로 하여금 천지(天地)의 생생(生生)하는 이치인 끊임없이 자손을 낳아 기르는 이치를 원망하게 하여, 집집마다 탄식하고 울부짖게 하니, 나라의 무법(無法)함이 어찌 여기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심한 경우에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지어 군적에 올리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올리기도 하고, 더욱 심한 경우는 강아지 이름을 군안(軍案)에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개의 이름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가끔 군첩(軍帖)에 나오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절굿공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시 한 편에서 만큼 어처구니없었던 당시 조선의 실상을 극명(克明)하게 실감한다.
다산이 이때 강진에 귀양 가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정승 판서 등 고위관직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과연 이런 기가 막힌 광경을 보고 들을 수 있었으며, 동서고금의 시사상(詩史上)에 희유(稀有)한 이 같은 시를 남길 수 있었을까?
인간은 결코 자기가 체험(體驗)한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어렵다고 한다. 자기 체험의 확대, 이해와 공감의 확대,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항상 상대방과 처지(立地)를 바꾸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애절양(哀絶陽)〉의 내용에서 시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병역제도(兵役制度)인 보법제(保法制)는 원래 상민(常民) 남자 16세부터 60세까지가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고 있었는데, 뒤에 이것이 신역(身役)에서 군포(軍布)로 바뀌면서 인두세화(人頭稅化)하였다. 그래서 나이 구분은 고사하고 다산의 지적처럼 이미 죽어 황천객(黃泉客)이 된 자나 뱃속에 든 아이, 심지어 허수아비의 이름까지도 군적(軍籍)에 올리고, 도망가고 없어진 친척이나 이웃의 몫까지도 마구 엉뚱한 자에게 몰아쳐서 한없이 숫자를 늘려 수탈했기 때문에, 민생(民生)이 그만 파탄(破綻)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화양모재(華陽茅齋)에서 인용)
지금 다산이 살던 시대로부터 200년 후 한국은, 미국에서는 내다버리는 광우병 소재인 소고기 내장까지 돈을 주고 수입하겠다고 하는 게 한,미동맹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지경이다. 국민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고위관료놈들과 배웠다는 놈들이 높은 자리와 지식도둑으로 이명박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같이 춤추고 있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명박을 내쳐야 한다.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다산이 머물었던 사의제(四宜齊)는 땅 기운이 쇠락하진 않았다.